▲우당기념관에 걸린 액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을 말하는 대표적 문구다
김정봉
우당은 남녀나 신분차별 같은 폐습을 거부해 평등사회를 지향하고 양육강식의 논리로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제국주의 강권지배에 대항했다. 권력의 집중보다는 분권, 연합을 주장했다. 권력이나 조직, 강권에 의한 지배 없는 세상을 꿈꾼 아나키즘의 선구, 우당은 소신에 따라 독립운동단체에서 어떠한 권력이나 감투를 거부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국민계몽과 외교노선만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 무장투쟁노선을 택했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이시영을 제외한 5형제 모두 객지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우당의 경우 묵비권을 행사하다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국내 신문에는 "60대 노인이 경찰서 삼노끈에 목 매달아 죽었다"라고 보도되었을 뿐이다. 비극적 현대사를 겪어온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기사로 들린다.
나라 판 돈으로 자기 땅을 산 윤덕영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기 땅을 판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라를 팔아먹고 챙긴 돈으로 자기 땅을 산 자가 있다.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이다. 그는 1910년 국권침탈 때 순종에게 강요, 한일합방조약(경술국치)에 옥새를 찍게 한 인물 중 하나다. 옥인동에 윤덕영이 흘리고 간 부스러기가 아직 남아 있다.
옥인동 군인아파트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땅 전부가 윤덕영의 것이었다. 옥인동 반이라 들었다. 별장 벽수산장, 99칸 한옥과 윤씨 가옥, 딸집(현 박노수미술관), 후처 과원댁 집이 들어섰다. 사람의 시야가 좁은 걸 고마워해야 하나? 욕심이 넘쳐 머리와 눈동자를 조금만 더 돌렸더라면 옥인동 전체가 그의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벽수산장(碧樹山莊)은 프랑스 궁전을 흉내 낸 윤덕영의 별장이다. 인왕산 문인들이 즐겨 모였던 송석원(松石園)자리에 들어섰다, 몇 점 자국만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벽수산장에 묻힌 송석원은 온데간데없고 그 표지석만 아무개 선산에 주인 잃은 비석마냥 군인아파트 건너편 도로변에 생뚱맞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