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사'의 승군들은 성곽 축성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이승숙
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마당을 돌아다니던 개도 두어 번 컹컹 짖더니 이내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졌다. 법당에서 혼자 예불을 올리던 스님이 손짓을 하며 불렀다.
조심스럽게 법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좌대 위에 있던 책을 한 권 펼쳐주며 예불을 따라해 보라고 권한다. 가끔씩 전등사를 찾아가기는 하지만 예불을 올려본 적은 없다. 그래도 펼쳐주는 페이지를 눈으로 따라 읽으며 스님이 절을 하면 절을 하고 염불을 하면 속으로 같이 읽었다.
한 시간여 만에 예불이 끝났다. 스님은 이것도 인연인데 점심 공양도 하고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따라가서 점심밥에 차도 한 잔 얻어 마셨다. 공양주 보살님이 안에 들어가더니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지금은 돌아가신 전 주지 스님이 손수 만든 자료집이라고 했다. 전 주지 스님은 해운사를 역사유적지로 지정받기 위해 애를 쓰셨다고 한다. 그러나 뚜렷한 유물이 출토가 되지 않아 지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해운사는 '진해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새로 세운 사찰이다. 진해사는 도성을 방위하기 위한 금위영(禁衛營)이 있던 갑곶진 근처에 있었다. 당시 진해사에는 50명 가량의 승군이 있었는데, 그들은 해안 방어 및 성곽 축성 등을 했다고 한다.
금위영의 대장인 민종도(閔宗道)는 숙종의 윤허를 받아 진해사 빈터에 창고를 짓고 본영의 군수물자와 병조(兵曺)의 은자(銀子) 3만냥, 목면 5백동 등을 보관하여 승군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도록 했다.
그러나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창고는 병인양요 때 불 타 없어졌고 그 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진해사는 화재로 소실되어 빈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0년경에 새로 건물을 짓고 '해운사'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