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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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육군이 훨씬 더 강한 상태에서 히데요시는 1592년에 임란을 일으켰다. 그는 육상 전쟁에서의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을 점령한 뒤 명나라·동남아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조 25년 4월 13일(양력 1592년 5월 23일)에 부산을 침공한 일본 육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조선 육군의 기둥인 이일과 신립은 각각 상주와 충주에서 격파됐다. 이때만 해도 히데요시의 꿈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명나라가 내란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조선만 점령하면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바다에서 일본군이 치명타를 입은 것이다. 전쟁 발발 3주 뒤인 5월 7일(양력 6월 16일)부터 조선 수군과 이순신이 옥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가 위협을 받으면서 히데요시의 계획이 꼬이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원래부터 우수하다는 사실을 히데요시가 몰랐을 리는 없다. 조선은 연안에 침투하는 왜구를 오랫동안 격퇴하는 과정에서 우수한 전함 및 해상전투력을 갖추었다. 왜구는 여러 세력으로 나뉜 데 반해 조선군은 단일한 군대였기 때문에, 대결이 장기화될수록 조선군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개전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는 양국 수군 간의 대결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육군 대결에서 승리하고 한성을 점령하고 선조를 생포하면 전쟁이 끝날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 수군이 물밑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수군이라는 변수를 깊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조선과 일본이 정식으로 수군 대결을 벌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열도에서 벌어지는 육상 전쟁에만 익숙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해상 전투라는 게 부차적인 요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수군 정예부대에 내려진 임무, '이순신 격파'잘 나가던 전쟁이 해상에서 뒤틀어지자,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의 사령관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그가 이순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1차 당항포 해전이 끝난 6월 5일(양력 7월 13일) 이후였다. 이순신을 그냥 두고서는 꿈을 성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직할 수군에게 이순신을 상대하도록 명령했다. 일본 수군의 정예부대에게 이순신 격파라는 임무를 준 것이다.
일본 수군의 역량이 조선 수군에게 뒤지는 상황에서, 히데요시의 직할 수군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없었다. 일본의 최정예 수군인 히데요시의 직할 수군은 7월 8일(양력 8월 14일)과 10일에 벌어진 한산도대첩 및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이순신에게 대패를 당했다. 직할 수군의 3분 2가 두 차례의 전투에서 와해되었다.
두 해전에 관한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 수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아예 상대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전함들은 조선 전함만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로 인해 이순신은 일본 전함을 바다로 끌어내느라고 무진장 애를 썼다. 선조 25년 7월 10일(1592년 8월 16일)의 안골포 해전 이후부터 선조 30년 9월 16일(1597년 10월 25일) 이전까지의 근 5년 동안에 이순신의 승전이 부산포 해전·제2차 당항포 해전·장문포 해전 등 몇 건 밖에 안 됐던 것은, 이 기간 동안에 전쟁이 소강 국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 수군만 보면 무조건 달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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