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권 없는 특별법 안되요'세월호 참사 100일을 하루 앞둔 23일 오전 '세월호 참사 100일, 특별법 제정 촉구 대행진'에 나선 유가족들이 안산 합동분향소를 출발해 1박 2일 도보행진을 하고 있다.
이희훈
[장면④] 방학 중 밀린 공문 처리를 위해 출근했더니, 고3 아이들 몇이 점심시간에 세월호 특별법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사가 장래희망이라는 '범생이' D는 또래들의 희생이 누구보다 가슴 아프다면서도, 단원고 재학생들의 특례입학 혜택에 대해서는 유난히 발끈했다.
한마디로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다른 보상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 또래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느냐는 볼멘소리다. 이게 선례가 되면 고등학생들이 사고를 당할 때마다 같은 요구가 쏟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단원고에 세월호가 대박을 안겨준 셈이라며, '희생된 친구 팔아 대학에 가려 한다'는 극언까지 마구 쏟아냈다. 또 그렇게 대학에 가봐야 제대로 학교생활 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진단도 내놨다.
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한 친구를 '지균충'이라 조롱하고, 편입한 친구더러 '편입충'이라 놀리며, 심지어 정시로 합격한 아이가 수시로 들어온 아이조차 얕잡아보는 현실에서 세월호 특례로 합격한 아이를 그냥 둘 리 있겠느냐는 거다.
앞으로 그들에게 우리 안전을 맡길 수 있을까그는 단원고 아이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학교에 직접 분향소를 만들었으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던 아이다. 그런데도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완강했다. 그렇듯 고3에게 대학입시란 수백 명 또래들의 억울한 죽음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됐다. 유가족들 어느 누구도 특례 입학을 요구한 적 없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들의 성난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고3 학생 D를 제외하고, 이웃 사는 아줌마 A와 헬스클럽의 몸짱 아저씨 B, 손자들 돌보는 할머니 C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오로지 TV를 통해 세상을 읽는다는 점, 특히 종합편성채널의 열혈 시청자라는 점이다. 그들은 말끝마다 'TV도 안 봤느냐'고 반문했다. TV는 그들 생각의 유일한 근거였다. 이런 안타까운 장면들이 고작 100일 만에 벌어졌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사실 정부와 여당 등이 지난 100일 동안 보여준 행태에 비하면, 보수 언론들이 그동안 내보낸 왜곡 보도를 떠올리면 이런 발언을 하는 '시민'들만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월이 약'이라고 여긴 탓일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넘도록 정부와 여당의 '뻗대기'는 계속되고 있다. 수만 명이 촛불을 들고, 수백 만 명이 서명을 하며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외쳐도, '전례가 없다'는 낯부끄러운 이유를 들어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가혹한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슴은 숯이 돼가고 있다.
그들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야 할 정치는 집 나간 지 이미 오래다. 온갖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연이은 인사 참사와 무책임은 이젠 조롱할 '깜'도 안 된다. 현 정부의 도덕적 파탄은 철저한 무능으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세월호 침몰 과정을 목도했을 땐 '과연 우리에게 국가가 있는가'를 물었지만, 이제는 '국가란 대체 무엇이며, 과연 우리에게 진정 국가가 필요한가'를 심각하게 자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40여일 전에 죽었다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잡겠다며 대통령이 앞장서고 민관군이 총출동한 육해공 검거 작전은 희대의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수사의 ABC도 갖추지 못한 채 '따로국밥'이 돼 헛물만 켠 검찰과 경찰의 모습에서 과연 그들에게 국민의 안전을 맡길 수 있는지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됐다.
보수언론, 무능한 정부의 가장 확실한 '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