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일어난 국체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고택. 대구 중구 계산동의 상화고택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만진
박찬호의 <한국가요사> 25쪽에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4일자에는 <국채보상가>라는 제목을 단 노래가 게재되어 있다. 작자는 함경남도 단천군 남문의 국채보상소 발기인인 이병덕, 김인화 등의 연명으로 되어 있으며, 가사는 4.4조에 한글이 섞인 시구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술이 나온다. 박찬호가 인용하고 있는 '<국채보상가> 전반부 일부' 중 가장 앞부분의 4행만 재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의 한글은 재인용자 표기)
愛國心(애국심)헤愛國心헤大丘(대구)徐公(서공)相敦(상돈)일세一千三百萬圓(일천삼백만원)國債(국채)設立(설립)同盟(동맹)斷烟會(단연회)라
노랫말에는 애국심이라면 대구 사람 서상돈이 최고라는 뜻과, 그가 금연으로 (돈을 모아) 1300만 원의 나라빚을 갚으려는 단체 결성에 앞장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이 대목은 1907년 당시 일본의 강압에 눌려 지게된 억지 나라빚이 1300만 원이었다는 사실과, 그 국채를 갚기 위해 민간 모금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1907년 국채는 당시 국가 예산 1년분1300만 원은 그 무렵 우리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사람들은 빚에 휘둘려 국가의 자주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1907년 2월 21일, 김광제 서상돈 등은 지금의 상공회의소에 해당하는 대구민의소 창립총회와 국민대회를 열면서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모금운동인 국채 보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