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2학년 3반 아이들.
이명재
'박예슬 전시회' 여기에 '유작(遺作)'이란 말을 넣어야 할 것 같다. 박예슬 학생은 지금 이 땅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포스터에는 '박예슬 전시회' 앞에 '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 17번'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놓았다. 이해가 갔다. 구체성은 기억을 더 오래 하도록 해주니까.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우리가 더 오래 기억해야 하고 박예슬도 그 아이 중 한 명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전시회 소식을 접하기는 시작 날(7월 4일)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부채감을 갖고 살던 때가 없었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꼰대'(?)의 자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요즘은 고루한 나의 정서와 다른 어린 아이들을 곧잘 나무라는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의 변화는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물속에서 죽어가는 300 명 가까운 아이들을 그냥 죽게 했다는 부채감, 그건 국가와 이 사회 무책임 그리고 돈만 밝히는 선주의 탓으로 돌리기 이전에 어른인 나의 책임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아이들에게 미안했고, 그 또래의 살아있는 아이들에게도 그런 감정들이 전이되어 갔다. 심지어 다 자라 성인이 된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꿈 많은 주인공 박예술...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꼭 가 봐야 할 전시회였다. 작가가 유명인이어서가 아니다. 또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꿈 많은 주인공 박예슬은 세월호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어린 학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이른 죽음을 '요절'이란 표현으로 미화하곤 한다. 헌데 박예슬은 그런 수사를 쓸 수도 없다. 아직 어린 학생이어서 그렇고 또 아직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기엔 이른 작가여서 그렇다.
하지만 유작으로 기한 없는 전시회를 열고 있는 예슬이를 예술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가장 일찍 저세상으로 간 예술가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만 17세의 아이로 하늘나라로 갔으니까. 뭐가 그렇게 바빴던지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박예슬 전시회가 시작되고 열흘쯤이 지난 15일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평강교회 박영복 목사님 내외가 서울역까지 차를 가지고 나왔다. 박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그날 서울 나들이가 내게 쉬운 여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40-2(2층) 서촌갤러리. 청와대가 주위에 있는 관계 탓인지 서울 한복판임에도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였다. 고도제한으로 개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리라. 또 사복 경찰이 요소요소에서 사람들이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박예슬 전시회에 대한 감시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이렇게 경찰들이 깔려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떻든 나를 주시하는 외부의 눈이 있다는 것은 상쾌하지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