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 때리고, 허벅지 꼬집고... 맛있게 마무리 됐네

아버지의 소박한 일탈... 순대국으로 달랜 밤샘 근무 피로

등록 2014.07.08 17:10수정 2014.07.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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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일하는 돌봄노동자다. 며칠 전, 밤샘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세상이 점점 밝아 올 무렵이면 몸은 양 다리에 모래 주머니를 두 개씩 채운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틀 전부터 밤샘 근무를 배치 받아 오후 9시 30분부터 다음날 오전 7시 30분까지 일해 온 터였다.


더구나 밤샘근무를 할 때는 컴컴한 도로 위에서 왕복 1시간 20분을 승용차로 통근하기 때문에 졸음 운전만큼 무서운 게 없다. 차창을 열고 선선한 바람을 쐬는 것은 물론, 잠을 깨기 위해 가끔 뺨을 때리거나 허벅지를 꼬집기도 한다.

사흘 내리 밤샘근무

 사흘간의 밤샘근무 피로를 풀기위해 막걸리를 찾았다
사흘간의 밤샘근무 피로를 풀기위해 막걸리를 찾았다김종신

다행히 오늘은 뺨을 때리거나 허벅지를 꼬집지 않고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사흘 밤샘근무가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경비 아저씨들이 출근하는 차들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나는 퇴근하는데 다른 이들은 출근이 한창이다. 잠시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봤다. 기름진 머리에 윤기없이 푸석한 얼굴. 두 눈만은 긴 밤을 지샌 사람치고 똘망똘망하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 바닥에 신문 두 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침 출근길이 바쁜 아내나 또는 등교에 서두른 아이 중 누군가 집 문을 열고 나서면서 배달된 신문을 부리나케 집안으로 던진 모양이다. 지역 일간지 하나를 챙겨들고 소파에 앉아 찬찬히 읽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아파트 오솔길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아파트 오솔길김종신

한참 신문을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아파트 안의 작은 오솔길을 찾았다. 보통 때 같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길. 이슬보다 더 가는 비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목적지는 아침을 해결할 국밥집. 가는 길 중간, 한 호프집 창문에 붙은 <벗을 만나>라는 시가 눈에 들어 왔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절친이었던 권필이 쓴 시다. 시의 구절구절들은 촉촉한 비와 더불어 술 마실 핑곗거리를 더했다.


벗을 만나

벗을 만나 술을 찾으면 술이 날 따라오기 힘들고
술을 만나 벗을 생각하면 벗이 날 찾아오지 않네
한 백년 이 몸의 일이 늘 이와 같으니
나 홀로 크게 웃으며 서너 잔 술을 따르네


'나 홀로 크게 웃으며 서너 잔 술을 따르네' 라는 구절을 눈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읽었다. 국밥집 앞 2차선 횡단 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영화 <복면달호>의 주제곡이 떠올랐다. 왜일까.

이차선 다리 위에 마지막 이별은
스치는 바람에도 마음이 아파와
왜 잡지도 못하고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어
...
이차선 다리 위 끝에 서로를 불러보지만
너무도 멀리 떨어져서 안 들리네
...
차라리 무너져 버려 다시는 건널수 없게
가슴이 아파 이뤄질수 없는 우리의 사랑

국밥집이 그다지도 그리웠나. 웃음이 났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평소와 달리 사랑을 노래할 만큼 퇴근길 졸음을 이겨낸 이 보람의 맛.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음식을 주문 하고 신문을 폈다. 펼치자마자 목마른 참새가 수돗가에서 목을 축이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목마름을 축이기 위해 순대국밥과 함께 막걸리를 주문했다. 국밥이 오기 전에 먼저 잔에 술을 채우고 밤샘 근무를 무사히 마친 나 자신을 격려 했다. 시원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벌컥벌컥 들어간다. 지난날의 힘겨움도 벌컥이는 소리와 함께 내 뱃속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막걸리에 순대국 한 사발

한 잔 비우고 두 잔을 시작하는 도중에 순대국이 나왔다. 당면을 넣은 순대가 아니다. 돼지 피로 속을 채운 순대가 뽀얀 사골 국물에 담겨 있다.

 목마른 새가 물을 찾듯이 나도 벌컥벌컥 피로를 앗아줄 막걸리를 마셨다
목마른 새가 물을 찾듯이 나도 벌컥벌컥 피로를 앗아줄 막걸리를 마셨다김종신

 후~ 후~. 뜨거운 기운을 입으로 바람을 불어 잠재워 후르륵 입속으로 넣었다.
후~ 후~. 뜨거운 기운을 입으로 바람을 불어 잠재워 후르륵 입속으로 넣었다. 김종신

 밤샘근무 피로를 씻겨주는 순대국과 막걸리 한잔
밤샘근무 피로를 씻겨주는 순대국과 막걸리 한잔김종신

"후~ 후~."

뜨거운 기운을 입바람으로 잠재우고 후루룩 입 속으로 넣었다. 피곤에 전 몸의 눅진함이 국물과 함께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된장에 풋고추를 경쾌하게 찍었다. 아뿔사, 땡초(매운 고추)다. 이미 늦었다. 입에서 불이 확 나자 탁주 사발을 물인양 들이켰다. 속에서 화끈화끈 열이 난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더 들이부었다.

국밥집을 나섰다. 올 때와 달리 비가 세차다. 그냥 피하지 않고 맞았다. 기름진 머리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굳이 뛰지 않았다. 안경에 방울방울 빗물이 맺혀 앞을 가렸지만 익숙한 길이라 그냥 걸었다. 집에 도착한 후, 샤워기를 밤샘 근무의 흔적을 마저 지웠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여분의 피로를 모조리 씻어 내는 듯했다.

 나홀로 크게 웃으며 서너잔 술을 따르네
나홀로 크게 웃으며 서너잔 술을 따르네김종신

덧붙이는 글 해찬솔일기 http://blog.daum.net/haechansol71
#밤샘근무 #돌봄노동자 #순대국밥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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