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회원들이 지난 6월 24일 이병기 국정원장 후보자는 '정치공작 전과'가 있다며 지명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참여연대
실제로 1997년 대선은 어느 해보다도 북한 변수, 즉 북풍이 창궐한 해였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1997.2)이 불어온 황풍(黃風), 국민회의 고문이었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월북(1997.8)에서 비롯된 오풍(吳風), 마침내는 김대중 후보에 열세였던 이회창 후보의 막판 뒤집기를 위해 북측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한 총풍(銃風)까지 등장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해엔 북한이 남한 대선에 개입하기 위해 전례없는 '대선공작반'을 운용했고, 안기부는 그것을 활용해 편승-역용공작을 펼쳤다. 그 결과 1997년 베이징은 북한 통일전선부와 남한 국가안전기획부의 치열한 정보전이 전개된 '거대한 공작 백화점'이었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공작처럼 베이징에서 벌어진 대북 해외공작은 이병기 2차장 관할이었다. 설령 국내 파트에서 주도한 공작이더라도 관할권을 침해하면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실제로 오익제 편지 대선활용 공작은 권영해 부장과 박일용 1차장의 지시 아래 101, 102, 103실이 모두 관여했다. 그러나 오익제 편지 활용공작이 국민회의 북풍대책팀의 '선공'으로 무력화되자, 파급 효과가 더 큰 오익제의 평양방송 연설내용을 활용한 '오대산 공작'을 추진했다.
이병기 차장, '오대산공작' 지시하고 '이대성 파일' 보고받았다 당시 국내 언론은 북한 방송을 직접 청취해 방송할 수가 없었다. KBS '남북의 창'이나 MBC '통일전망대'는 안기부 '심리정보실 개발과'에서 공급한 프로그램만 방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외신에서 보도한 뒤에 이를 국내 언론이 인용 보도토록 하는 '국내 역유입 공작'을 추진한 것이다. 실제로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박일용 차장의 요청을 받은 이병기 2차장은 202실장(해외정보실)에게 "오익제의 평양방송 내용을 입수, 해외언론에 보도되도록 해 국내언론이 인용보도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상부 지시를 수행하려면 사업(공작)명과 기본계획이 있어야 예산이 집행된다. 202실장은 사업계획을 '오대산공작'으로 작명해 우리 교민들이 밀집해 있는 베이징, 도쿄, 홍콩 등 5개 해외 거점장들에게 "오익제 월북이 국민회의 후보(DJ)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부각 시킨 '보도 요지'를 시달하면서 주재국 언론에 보도되도록 추진하되, 안기부가 보도의 출처로 인용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외 거점장들은 주재국 언론인을 접촉하면서 출처를 숨긴 채 오익제 평양방송 녹음테이프를 제공해 보도를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설로만 존재했던 북풍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말렉 공작의 꼬리가 밟힌 데서 비롯됐다. 안기부 협조자(윤홍준)의 자백으로, 회견을 사주한 직원들이 체포되는 등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대성 203실장은 아말렉 공작을 은폐하고 수사를 차단하기 위해 기존의 공작문건을 짜깁기해 별도의 파일(이대성 파일)을 작성했다. 안기부 공작원과 협조자들이 북한측 인사들을 접촉한 결과를 근거로 김대중 후보와 국민회의측의 대북연계 의혹을 제기한 '대선 전후 북한의 대남공작기도와 전망'(종합보고) 등 총 174쪽 분량의 1급비밀 문건이었다.
비밀문건은 공작원의 검증되지 않은 첩보보고(디브리핑)에 근거한 것이었다. 전체적인 기조는 김대중 후보 및 국민회의가 오래 전부터 북한측과 밀사를 주고받으며 자금을 수수하고,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하는 등 북한과 긴밀히 연계돼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안기부는 '김대중 낙선공작'을 한 것이 아니고, 공작원-협조자의 첩보보고를 근거로 오랜 기간 대북 연계 의혹을 추적해왔으며 윤홍준 기자회견은 안기부와 무관한 개인의 돌출행동(애국심의 발로)이었다는 것이다.
이대성 실장은 2월초 이병기 차장과 권영해 부장에게 대선 관련 공작 종합보고서(이대성 파일) 총5부를 작성해 보고했다. 이 실장은 3월초 위 종합보고서의 보고일자를 '98.3'으로 변경해 권영해 부장-이병기 차장에게 재보고하는 한편, 추가로 사본을 작성했다. 이후 3월 8일 타워호텔에서 정대철 국민회의 부총재를 접촉해 1급비밀 문건인 '이대성 파일'을 전달했다. 이 실장은 평소 알고 지낸 정 부총재에게 "윤홍준 기자회견은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인데 억울하다. 이 문건을 읽어보면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대통령께도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병기 차장, 이임하면서 비밀 총121건 400여쪽 교부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