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내 단어 공책. 사전을 일일이 들춰보며 고른 단어들을 하나하나 적는 일이 짜릿했다.
정은균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단어 모음집이다. 나는 단어들을 2004년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그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한 장편소설(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소설이 언제쯤 나올지는 나도 알 수 없다!)을 위해서였다. 소설 문장에, 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이나 고풍스러운 한자말 등을 멋들어지게 쓰려는 운산에서였다. 18세기 중·후반이라는 소설 배경에 걸맞은 어휘문체를 나름대로는 구사하고 싶었다.
사전 속에서 새로운 단어 찾을 때마다 짜릿단어 수집은 대학 시절에 산 낡은 국어사전을 맨 첫 장부터 직접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음에 드는 낯선 말들을 고르는 식으로 했다. 서점엔 '아름다운 우리말 사전' 류의 제목을 단 책들이 많다. 인터넷에도 '사라진 순우리말 단어' 등의 자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옮겨적는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난생처음 만나는 말이지만,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골라 공책에 적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공책에 단어 하나 하나를 채워 넣을 때마다 내 언어 감각을 이루는 세포들이 소리없이 분열하는 듯했다.
사전 낱장을 넘겨가며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골라 하나 하나 정리하는 일은 2006년 3월 15일자에서 멈췄다. 핑계는 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목줄을 죄오는 직장 일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때문이었다. 내 미완성 단어 공책에 실린 마지막 단어 세 개는 '부라질', '부룩송아지', '부모구몰'이다. 나는 이들을 공책에 옮겨 적은 뒤로 한 번도 사전을 펼치지 않은 듯하다.
사전을 찾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사전을 전혀 보지 않는 건 아니다. <세계일보>가 전국 16~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설문조사 결과,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 60.7%의 성인들이 국어사전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다만 이들이 이용한 건 인터넷 사전(포털 내 사전)이나 스마트폰 사전 앱이었다. 비율이 95.6%나 되니 대다수다.
종이사전을 이용한다는 사람은 3%에 지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사전을 보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해야겠다. 학교라고 다를까. 4~5년 전까지만 해도 교실에서 종이사전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어사전은 드물긴 했어도 영어사전은 꽤 많았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책장을 펼쳐놓고 밑줄 치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전 사라진 교실 풍경
내가 작년까지 근무했던 고등학교에 '특이한'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한자사전을 쓰게 하신 한문 선생님이셨다. 수업 시작 즈음이면 각 반 주번이 한자사전이 담긴 바구니를 가지러 교무실에 온다. 주번들이 낑낑거리며 들고 간 사전들은 아이들 한 명 한 명 손에 쥐어졌다. 집에서 사전을 챙겨오라고 해도 변변한 사전 한 권 없는 게 대다수 아이들의 현실이다. 한문 선생님이 통째로 사전을 구비하신 이유일 게다.
이즈음 몇 년 새 사전 보는 아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교사인 나조차 사전을 이용하지 않는다. 교실에서 사전이 사라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3일 오후, 올해 내가 맡은 한 중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혹시 최근 한 달 사이에 종이사전 이용해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볼래?""종이사전만 손 들어야 해요?""그래, 국어사전이든 영어사전이든, 아니면 그밖의 다른 사전이든, 종이로 만들어진 사전을 최근 한 달 사이에 한 번이라도 이용했으면 손 들어봐."아이들 35명 중에 6명이 손을 들었다. 17%다. 그나마 학생들이기 때문일까. <세계일보>가 전하는 성인 종이사전 이용자 비율 '3%'보다는 훨씬 높았다.
"6명이나 되니 훌륭하다. 그럼 이중에 국어사전을 본 사람 있을까?"6명의 아이를 번갈아보며 다시 물었다. 2명이 손을 들었다. 내처 집에 국어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25명이 손을 들었다. 어린이용(초등학생용) 사전인지 일반사전인지도 물었다. 대다수가 어린이용 사전에 손을 들었다. 그야말로 온전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전이 없으니 아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말하기나 쓰기는 단조롭고 상투적이다. 물론 아이들은 끊임없이 소통한다. 쉬는 시간이나 하교길에 아이들이 내뱉는 말들은 엄청나다.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 또한 대표적인 말 공장이다. 자기네만의 카톡방이나 밴드를 만들어 무수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런데도 그 많은 말과 글들은 조각조각 파편화돼 있다. 말이 말을 잡아먹는 형국이랄까. 소통이 불통이 되는 역설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