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 포스터. 조선시대 남자들의 수염을 재현한 모습.
영화 <관상>
수염을 달고 다니면서 주변 반응 때문에 나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수염 기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영화나 사극을 보면 모두 수염을 달고 나오는데 지금 길거리에 나가 수염 기른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 많던 조선의 수염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져 버린 그 수염들이 궁금해졌다. 사라져버린 그 비밀 속에는 격변기 조선왕조의 비극과 외세와 침략, 전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근현대사가 들어 있다.
19세기 말 조선왕조의 끝자락, 나라는 비록 혼란에 빠져 있었어도 수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격변하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조선의 수염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무능한 국왕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한 나라의 국모를 자객들이 무참히 죽이고 불태워버린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그 해(조선 개국 504년-고종32년 1895년) 1월 1일을 기해 양력 채용과 더불어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졌다.
일본의 강요로 국왕인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였으며, 관리들은 거리로 나가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지키는 것이 효(孝)의 시작으로 받들던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하루 아침에 거리에 버려져 수난을 면치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다. 이에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오두가단 차발불가단(吾頭可斷 此髮不可斷)"을 외치며 단발령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하지만 힘없는 나라는 백성들의 수염은 끝내 지켜주지 못했다.
누구나 가졌던 수염은 단발령으로 잘린 상투와 함께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 했지만, 곧바로 터진 전쟁으로 폐허의 거리에는 '기브미 초콜릿'과 함께 신식이라는 미국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덕(?)에 우리 것은 무조건 구식이 되었고, 구식을 버리고 들어선 신식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규정되었다.
물밀 듯이 들어온 무비판적인 신식문물은 단발령 이후 설 자리를 잃어가던 흔들리던 조선 수염에는 치명타가 되었다. 군부독재시절 '새벽종'이 울릴 때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면도 하고, 양치하고 씩씩하게 학교 가기를 배웠고, 그 시절 수염을 기른 이는 필시 퇴폐적이고 저항의 상징이었으리라.
긴 머리는 퇴폐였고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고운 아침이슬'은 봐서는 안 되는 금기의 시대였다. 그곳에 수염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할아버지 사진 속 그 많던 이 땅 수염들은 그렇게 사라져 갔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침마다 보는 수염이 사라진 날카로운 턱 선 속에는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던 우리의 근현대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조선 수염을 찾아서류현진 선수가 뛰고 있는 LA다저스에는 수염을 달고 있는 브라이언 윌슨이라는 선수가 있다. 한 면도기 회사가 수염 깎는 대가로 11억여 원을 제시했다가 거절당했던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브라이언 윌슨은 자신의 연봉보다 많은 금액 제시를 뿌리치며 한 말은 "수염은 나의 이름과 같다. 나는 이 수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신체발부수지부모'를 알며 진정한 자존심을 아는 친구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일부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이미지 확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신체 일부를 기르고 마는 행위가 타인들에게 크게 이슈화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머리를 짧게 하든 길게 하든 그 사람의 개성으로 봐주듯 수염 또한 그리 봐주면 될 일이다.
친구 중에 수염을 기르는 친구가 있다. 외국을 드나드는 그 친구가 해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 수염에 대한 굴절된 시각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친구는 외국인 친구들 만나면 습관적으로 자기 수염에 대한 인상을 물어보곤 했다 한다.
"내 수염 어때? 이거 깎으면 어떨까?" 이에 대한 대부분 외국 친구들 반응은 "수염을 깎든 안 깎든 네가 변하는 것 없잖아. 한 번 더 길러봐"라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 깎는 것과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수염을 기르든 안 기르든, 머리를 기르든 안 기르든 뭐가 차이가 있겠는가. 우리들의 인식 속에는 그 동안 수염 기른 이를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염을 기르는 것은 뭔가 다른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받아들이는 굴절된 시각이 존재한다.
이제부터라도 수염은 수염일 뿐 기르고 안 기르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바라보자. 왜 우리는 면접 시 반드시 수염을 자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수염조차 퇴폐, 반항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향된 사고의 틀을 깼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도 지난 백여 년 동안 잃어 버렸던 조선 수염의 부활을 선언하자.
방황하는 중년 삶에 대한 저항의 상징 두 달 된 턱수염을 밀기로 했다. 없애기 위해 밀은 것이 아니라 기르기 위해 밀었다. 그동안 수염을 기르며 느꼈던 색다른 경험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그 경험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밀고 다시 길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얼떨결에 처음으로 두 달이나 길러봤지만, 앞으로는 두 달이든 세 달이든 그 과정을 기억하며 길러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뭐 거창하게 인생의 전환점이니 굳은 결심이니 이런 건 없다. 그저 두 달 동안 기른 털이 된 수염을 밀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싶다. 또한 내 수염 속에 들어 있는 이 사회의 길들여진 관행에 저항을 해보련다. 왜 머리카락은 남겨두고 턱수염은 없애야 하는지 아침마다 생각해보자.
관행으로 묶어두었던 수염을 탈출시켜 보자.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브라이언 윌슨'만큼 값진 수염은 아닐지라도 한 번 도전 해 보시길 바란다. 내일부터 거리에서는 수염 달린 남자가 넘쳐 나길 기대한다. 한 번 꼭 해보시라. 생각보다 재미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마다 자유의 턱수염이 달려 있는 열린 우리 사회를 보고 싶다.
과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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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머리카락은 남겨두고 턱수염은 없애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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