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실종된 아들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며 부모들이 갖다 놓은 물건이 놓여 있다.
권우성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출발한 버스는 다섯 시간 만에 전남 진도에 들어선 후에도 한참을 더 달려서야 팽목항에 닿았다. 한때 항구를 가득 메웠던 천막이 하나둘 빠져나간 후 휑해진 그곳은 짙은 해무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다 위에서 끼익끼익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빈 여객선과 그 옆에 색색의 과일로 차려진 제사상이, 이 적막한 항구가 연일 뉴스를 도배했던 현장임을 알려줬다.
방파제에는 노란 리본이 빼곡했다. 배를 타고 한참 더 나가야 한다는 사고 해역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사람들은 방파제 끝까지 나가 그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을 것이다.
'내 새끼야, 보고 싶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이제 그만 돌아와 다오' '내가 엄마의 아들이어서 행복했어요' '네가 나의 아들이어서 고마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어 그 난간에 매달아 놓았다. 멀리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천막이 외따로 떨어져 있다. 6월 8일 이후 아직 저 천막을 거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11명. 아직 11명이 저 검은 바다 속에 갇혀 있다. 이제 성별조차 가리기 힘들 만큼 변한 시신을 가족들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팽목항으로 가는 버스더딘 구조 작업에 가슴을 쥐어뜯던 유족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간 자식을 한 번 안아주고 보내게 해달라던 비명같은 요구도 더는 이뤄질 수 없다.
방파제의 끝에 서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마음속으로 부른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 그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따라 불러본다.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잠수사의 손을 잡고 나와 가족의 품으로 인도될 수 있기를. 그래서 이 악몽 같은 장례가 어서 끝나기를.
나는 비명에 죽은 자식의 영정을 끌어안은 부모의 심정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유가족들의 마음은 안다. 꿈인 듯해 어서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가슴이 내려앉고 눈물이 터지기를 반복하는 상실의 시간. 8년 전, 단 며칠이었으나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간. 내 언니의 장례였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묵묵히 끌고 나간 언니와 형부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상복은커녕 검은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죽어 사라졌는데 그 따위 의식이 다 무언가 싶기도 했지만, 갑작스런 가족의 죽음에 대처하는 법을 몰랐고 무엇보다 너무 피곤했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어차피 꿈이 아니라면 어서 이 장례가 끝나기만을 바랐다. 장례식은 정말 꿈결 같아서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장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안에 흐르던 그 무거운 정적만은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는 각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쓰러지듯 잤다. 3일 만에 자는 잠은 슬프고 달았다.
다섯 살 위 언니와 나 사이에는 놀랍도록 추억이 없어서 나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이래도 될까' 싶을 만큼 아프지 않았다. 온몸이 마취된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나는 불쑥 혼자 울었다. 내 피와 살 어딘가에 묻혀 있다가 불쑥불쑥 흘러나오는 존재. 그것이 혈육인가 보다, 생각했다.
마취가 풀린 후 통증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영구차 기사가 언니의 유해를 얼른 뿌리고 오라며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이, 한 인간의 마지막 흔적을 고작 상조회사의 기사가 아무런 의미 없이 가리킨 야산에 뿌려 없앤 것이, 그녀의 32년 삶을 단숨에 압사 시킨 차주의 보험사가 과연 그 삶을 제대로 정산했는지 따져 묻지 않은 게 두고두고 가슴 한켠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은, 채 식지도 않은 주검으로 돌아온 딸의 얼굴을 만지며 "아직 따뜻한데요. 살아있는 거 같은데요. 안 죽은 거 아입니까?"라고 의사를 붙들고 물었다는 아버지가 떠오를 때다. 혹시라도 의사가 너무 일찍 자신의 딸을 포기한 게 아닌지, 그 순간 아버지는 얼마나 간절했을까.
32년 전, 세게 쥐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생명을 손에 안아본 후 아버지는 비로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고 했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비빌 언덕도 없어 마음 둘 곳 없었던 가난했던 남자에게 그녀는 뿌리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떠난 후 "자식이 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뿌리가 잘린 듯한 통증을 느낄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