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씨름하는 친정아버지
박봉희
25년 전, 결혼 당시 뇌경색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거동이 불편했던 시어머니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평소 천식을 앓고 계시던 시아버님은 천식이 아닌 위암으로 수술을 받고, 5개월 정도의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퇴원 후 그때의 아득함이 떠오른다. 누군가 돕는 손길, 지역의 자원 연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우리가 국민건강보험료를 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지원이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결혼 초부터 씨름했던 어르신 돌봄, 간병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 2008년부터 제도화되었으나, 경쟁과 시장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존엄케어가 아닌 노인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법제도를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잘 운영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의료협동조합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안심하고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다." 1998년 당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의사인 한신의료생협 부이사장이 힘주어 한 말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층 재활센터, 2층 재택간호, 3층 데이케어 룸으로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또 아픈 노인이 누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활동할 수 있도록 내부 시설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와 각자 개성 있게 배치한 방들, 획일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이 존중되는 재활 중심의 노력들이 시설 곳곳에 배어있었다.
일요일이면 지역 청소년들이 발표회도 하고, 데이케어센터는 조합원의 자원 활동으로 운영된다. 30년 동안 자신의 혈당과 혈압을 체크한 수첩을 자랑하는 당뇨와 고혈압 환자의 자조모임, 치매노인과 놀이치료를 재미나게 하고 있는 다운증후군 직원까지. 그 해맑은 직원의 웃음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다.
눈이 번쩍 띄었다. 내 가족이 온전히 감내하던 노인 문제를 의료협동조합이란 공간에서 그것도 지역사회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의료협동조합을 제대로 해보자 하는 열정으로 한국에 돌아왔었다. 그 당시 열정이 내 친정아버지를 가족같이 모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니,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후 준비로 출발했었던 꿈이 그래도 빨리 이루어진 셈이다.
오물더미 속 노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의사는...수년 전 원주의료협동조합 실무자가 독거노인 방문 진료 현장을 얘기한 적이 있다. 허름하고 낡은 집에 오물더미와 함께 누워 있는 노인들은 각종 만성질환에 심한 관절통으로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었다.
한 집 한 집 돌며 당시 우리는 이것이 참 의료라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분들 건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단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집에 의사가 직접 온다는 그 사실만으로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한번 번졌을 뿐, 그 외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우리가 명확하게 확인한 것은 쓰라린 현실이었다. 연료비가 없어 차가운 온돌 위에 전기장판을 깔고 그것도 전기료를 아끼려고 잠들기 전에만 잠시 사용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의사가 고작 한두 번 좋은 약을 처방하고 한의사가 직접 침술치료를 한다고 해서 건강해지지는 않는다는 현실 말이다.
이 분들이 건강하려면 우리와는 다른 의사가 필요했다. 단열공사를 해서 집을 따뜻하게 해 줄 사람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료비를 지원해줄 사람, 수시로 찾아와 삶을 나눌 사람이 이분들에게는 바로 의사였던 것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건강하지 않다면, 가족과 함께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행복하면 건강하다는 사실은 이제 놀라운 게 아니다. 건강해야 더 행복해질 수 있고 행복하면 질병도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가. 건강은 개인에 대한 행복 조건으로서 조장되고, 아프지 않을 때는 항상 '남의 이야기'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