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새벽,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가져온 영정사진을 품은 채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권우성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당시 지내던 사무실에 다시 앉아 있다. 지난 5월 24일 종각 네거리에서 연행되고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하면서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었다.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몰아세우기도 했다는 생각에 잠깐 동안은 빠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간절했다.
5월 8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1박 2일 동안 꼬박 날을 샜다. 세월호 유가족분들, 그리고 죽었다고 믿을 수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학생들의 영정 앞이었다. 150여 명의 학생들의 영정이 와 있었는데 딱 한 학생과만 눈이 마주쳐보고는 그 어떤 영정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다. 5월 17일, 18일, 19일까지는 2박 3일을 잠 한 숨 잘 수 없었다.
5월 17일, 청와대로 향하는 안국동 사거리에서 115명의 사람들이 끌려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음산하던 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륭전자에서 94일을 단식했던 김소연도, 65일을 단식했던 유흥희도 끌려갔다. 기아자동차비정규직 투쟁을 책임지고 3년을 살다 나온 김수억도 끌려갔다. 6월 10일 다시 연행되어 지금은 구속된 촛불시민 김창건도 끌려갔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끌려갔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끌려갔다 나 혼자 산자가 되어 안경도 잃어 버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채 혼자 절뚝거리며 아무 일 없이 붐비는 종로 네거리를 걸어오는 내내 하나의 시만을 줄곧 생각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오로지 운이 좋았던 덕택에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그러자 지난 밤 꿈속에서친구들이 나에 대해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그 밤새 내내 민변에 연락을 하고, 인권단체들과 소통하고, 긴급하게 보도자료를 내고, 소식들을 알리며 날을 샜다. 18일날은 광주 5·18민중항쟁 서른네 돌이 되는 날이었다. 청계광장에서, 그리고 광화문 현판 아래 모여 만민공동회를 열던 날이었다. 그날은 더 끔찍한 날이었다. 광화문에 있는데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장례식장에서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 열사의 시신이 탈취당하고 있다는 속보와 빨리 와달라는 문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급히 이동하는 도중 도중에 17일날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친구들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 중간 중간 장례식장에서 연행들이 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수고했다고, "축하축하!" 한껏 톤을 높여 이야기하다가 전화가 바뀌면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예 알겠습니다. 가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도착한 장례식장은 이미 상황이 끝난 폐허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곁에 잠깐 앉아 보기는 한 것 같다. 이내 일어나 조용히 나왔다. 그런 날은 서로 무슨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소주라도 한 잔해야 하나. 함께 간 쌍용차, 코오롱, 기륭, 세종호텔의 해고노동자들, 빈민해방실천연대의 000, 인권운동사랑방의 명숙 등과 어느 늦은 밥집에 앉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광화문 네거리였다. 세월호 정국 내내 침묵시위로 우리의 마음을 전했던 '가만히 있으라' 학생들과 시민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숟가락을 놓고 다시 한달음에 달려 간 광화문에서는 3차 연행이 진행되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경찰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총 65명이었다. 의료원에서 끌려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30여 명이었다.
지금은 6월 10일 청와대 만인대회 건으로 구속되어 있는 오래된 벗 정진우도 이날 연행되었고, 오진호도 연행되었다. 다음 날엔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위영일과 라두식과 김선영이 끌려갔고, 그들 역시 구속되었다.
이것은 세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