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성계(유동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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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끈끈했던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사이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급속도로 틀어지고 만다. 원인을 먼저 제공한 쪽은 신덕왕후였다. 남편이 왕이 되자마자 이방원을 집중 견제하고 나섰던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이성계의 친위 세력인 여진족 사병부대가 의흥친군위라는 경호부대로 편입되었다. 이성계를 왕으로 만든 부대가 의흥친군위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의흥친군위의 책임자인 절제사가 되는 왕자는 차기 주상의 후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태조실록>에 따르면, 건국 22일 뒤인 태조 1년 8월 7일(양력 1392년 8월 25일)에 단행된 인사 조치에서 이방원은 의흥친군위 절제사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이방과·이방번·이제가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이방과(훗날의 정종)는 첫째부인의 아들이고, 이방번은 둘째부인인 신덕왕후의 아들이며, 이제는 신덕왕후의 사위였다.
첫째 부인 쪽에서는 이방과 한 명만 들어가고 둘째 부인 쪽에서는 이방과·이제 두 명이 들어간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인사 조치에는 신덕왕후의 입김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정치적 판단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 정도전과 신덕왕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인사 조치는 사실상 신덕왕후의 작품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인사 조치에서 이방원이 배제된 것은,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끈끈한 동지였던 두 사람이 건국 3주일 만에 이렇게 분열됐으니,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방원의 형인 이방과가 절제사가 된 데 대해서는 이방원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번·이제를 임명하면서 이방원을 배제한 것은 이방원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인사 조치는 누가 봐도 좀 이상한 것이었다.
항상 이방원을 경계했던 신덕왕후그 뒤 신덕왕후는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된 이방번을 세자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자 신덕왕후는 정도전과 손잡고 둘째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된 왕자들이 후계자 구도에서 모두 밀려났지만, 신덕왕후는 처음에는 자기 아들을 절제사로 만든 뒤에 세자로 세우려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사가 되는 것은 처음에는 매우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다.
이방원을 그토록 아끼는 것처럼 보였던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배제한 것은,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그의 능력과 야심을 잘 파악했던 것이다. 신덕왕후는 이방원과 함께 정치공작을 벌이는 중에도 항상 이방원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덕왕후는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방원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방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작은엄마가 자기를 밀어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치적 동지였던 작은엄마가 건국 3주일 만에 자기를 토사구팽했다는 사실로부터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작은엄마가 정도전과 손잡고 자기를 견제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금이 아닌 재상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전이 작은엄마의 편에 서서 이방원 자신을 압박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권 잡은 뒤 10년 동안, 이방원이 꾹 참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