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정리 된 헌책방 내부세이린도쇼반은 휠체어를 타고 들어 온 손님도 편하게 서가 사이를 오갈 수 있도록 책장과 책장 사이를 넓혔다. 책들은 일꾼이 한 권 한 권 얇은 유산지로 겉을 싸서 깨끗하게 진열한다.
윤성근
이런 얘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도착한 헌책방은 니시오기쿠보 역에서 멀지않은 '니와토리분코(にわとり文庫)'다. '니와토리'는 우리말로 '닭'을 뜻한다.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이 헌책방은 작은 규모로, 그림책과 오래된 만화책 등을 위주로 책장을 구성했다.
일본 헌책방은 대부분 이렇게 점포 특성을 명확히 살려서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헌책방을 가든지 예전에 갔던 다른 헌책방과 비슷할 확률은 별로 없다. 책장은 깨끗하게 정리되어있고 책들도 모두 깔끔한 상태여서 놀랐다. 심지어 책들이 상하지 않도록 일일이 얇은 유산지에 싸서 진열하는 곳도 많다. 이 역시 15~20년 전부터 서서히 변화된 결과다.
"전에는 헌책방 손님들이 대부분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 맞춰서 영업을 했지요. 헌책방에 들어서면 벽에 에로틱한 여자 누드사진이 걸려 있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곳은 없습니다. 헌책방도 여성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에 좀 더 깨끗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분위기에도 맞춰서 점포를 재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니시오기쿠보는 바로 옆 동네인 '오기쿠보', 그리고 '키치죠지'로 이어지는 한적한 골목길이 인상적인 조용한 곳이다. 도쿄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전철이 있다고는 하지만 주말엔 니시오기쿠보 역에 정차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전철역을 끼고 있는 곳이다. 그렇게 고즈넉한 동네이기 때문에 작고 아담한 카페나 잡화점, 서점들이 골목길 여기저기 많이 있다.
몇 해 전부터는 동네 상인들이 힘을 모아 장마철이 되기 전에 '차산뽀(茶さんぽ)' 행사를 개최한다. 차산뽀는 명칭 그대로 '차(茶)'와 함께 '산책(さんぽ)'을 즐기자는 뜻이다. 올해는 이 근방 점포 105개가 함께 했다. 니와토리분코도 차산뽀에 참여하여 만화책과 귀여운 목각인형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차산뽀 기간 동안 이 동네를 찾아 온 사람들은 저마다 특색을 갖고 운영하는 오래된 카페와 서점을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골목길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는 떠들썩하지 않은 초여름 축제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요즘은 동네마다 특색을 갖추려 노력하고, 관청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일본도 관청과 협조가 잘 되는지, 이런 축제를 기획할 때 재정적인 지원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관청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상인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런 일을 만들고 있습니다. 도쿄의 대규모 헌책축제도 보통은 자력으로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로 오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상인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를 내놓고 시행합니다. 그래야 장사도 하고 가게도 알릴 수 있으니까요."관청의 지원 사업이라는 것을 평소에 마땅치 않게 생각해 온 나에게 이 대답은 신선한 자극이 됐다. 외부에서 돈을 받아 시행하는 일은 즉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영원히 지원을 하거나 받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자력으로 하는 것이 맞다. 한 마을에서 수십 년 동안 이어지는 꾸준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콘텐츠의 힘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 아무리 화려한 사업을 기획하고 거기에 돈을 들이부어도 대를 이어 운영하는 마을 서점과 카페의 소소한 콘텐츠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오랫동안 그림책을 전문으로 다룬 니와토리분코는 내가 좋아하는 루이스 캐럴의 책을 종류별로 모아 놓았다. 평소 캐럴의 책을 수집하고 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에 거기 있는 여러 권 중에서 1980년대에 펴낸 아서 래컴(Auther Rackham)의 채색 삽화가 들어간 책을 한 권 구입하고 다른 헌책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패전 후 헌책방조합을 다시 세운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