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신혼 때 서울 상경 기념으로 찍으신 사진
김윤희
아버지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붕대를 감고 계셨다. 차에 부딪혀 몸이 공중으로 떴다 바닥으로 떨어질 때 몸의 중심을 잡아줄 뼈들이 조각나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술을 시도해 볼 수조차 없고, 약으로 심장을 겨우 뛰게 하고 있는 중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힘겹게 누워 계셨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내가 알던 모습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얼굴의 크기는 두 배로 부어 있었고, 뒤통수에는 흘러내린 피가 굳어 엉망인 상태였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부어 버린 손은 몹시 차가웠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내게 간호사가 말했다.
"눈을 뜨고 움직이지는 못해도 귀로 들으실 수는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약을 쓰고 있지만 더 이상 효과가 없어요.""아버지 많이 아팠겠네. 이런 일로 안아 주고 만져 줘서 미안해요. 힘들면 편히 쉬어요.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못했네…. 사랑해요, 아버지."그 순간 아버지는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만약, 그 말을 좀 더 늦게 했더라면….
아버지께서 매일 신문을 읽으셨던 이유지난 5월, 아버지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책상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돌아오시면 책상 위에서 신문을 펼치셨다. 신문을 읽는 그의 오른손 옆에는 항상 가위가 놓여져 있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써진 영어 문장을 오려 스크랩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으로 생계를 책임지느라 긴 가방 끈을 갖지 못했다. 아버지는 항상 그것을 슬퍼했고 딸들에게 배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부터 신문 스크랩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취미라기보다 딸에게 많이 배우지 못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고, 딸보다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아이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조카나 제자들의 이런저런 질문에 시원스럽지 못한 답을 하고 나면 부끄러워졌다. 아마도 아버지는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꼼꼼하게 준비하며 공부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에게는 영어와 관련된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영어를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의 생각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슬펐을까.
용돈 받기를 꺼리셨던 그아버지의 책상. 그의 온기가 느껴질 듯도 한데 의자의 딱딱함만이 내게 전해졌다. 서랍을 여는 순간,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얼른 눈물을 닦아냈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 서랍 속에는 죽은 동생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오시면 먼저 떠난 동생을 "나쁜 놈"이라고 욕하시곤 했다. 엄마와 언니들은 동생을 그리워하기는커녕 욕만 해댄다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너무나 그리워서 반어법을 썼다는 사실을 왜 몰랐던 것일까.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프다.
그 사진 옆에는 빈 봉투가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많은 종이봉투를 모아뒀을까 의아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아버지께 용돈을 드릴 때마다 사용했던 봉투였다. 아버지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그 봉투를 모아두셨던 것이다.
처음, 아버지는 용돈 받기를 꺼리셨다. 용돈을 받는 것은 노쇠했음을 받아들이는 꼴이 된다며 자신의 건강함을 강조했다. 딸들에게 받은 용돈은 저금하거나 손자들에게 용돈을 줄 때만 썼다. 당신을 위해서는 절대 쓰지 않았다.
맨 위에 놓인 봉투에는 돈이 들어 있었다. 올해 1월, 새해를 맞아 빳빳한 새 돈으로 넣어드렸던 것이었다.
'아버지, 이렇게 가실 거면 다 써 버리시지.'아버지가 남긴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