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전설이다>의 한 장면. 좀비가 가득한 도시에 홀로 남은 주인공의 처절한 외로움을 비좁은 욕조에 누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60억 인류 중에서 59억이 넘는 대다수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궤멸하고, 그 중 1억이 넘는 사람들은 바이러스로 인한 변이 때문에 흡혈귀가 되어버린 세상. 그 안에서 항체를 가진 덕분에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다.
영화에서 그러하듯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혼자 남은 환경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상대하면서 살아야 하는 네빌 박사의 모습을 묘사한다. 외로움과 이질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포의 근원이라는 듯이.
흡혈귀가 활동하는 밤에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서 지내고, 반대로 흡혈귀가 잠든 낮에는 폐허가 된 듯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흡혈귀를 사냥하는 네빌 박사. 처절하게 외로운 그 싸움에서 네빌 박사는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듯한 흡혈귀들과 아슬아슬한 대결을 이어간다. 무엇보다도 상대는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는 혼자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인간이 변한 존재가 좀비냐 흡혈귀냐' 뿐만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좀비 바이러스'의 치료법이자 백신을 개발하는 네빌 박사의 숭고함과 희생정신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하여 그는 전설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다르다. 본문의 네빌박사는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일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소설은 시종일관 '치료'와 '구원'의 메시지를 향해 아무런 전개를 끌어내지 않는다.
그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기대하거나 평소에 자연스럽게 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이다. 그것은 곧 정상과 비정상, 혹은 다수와 소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통째로 뒤엎는 일이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과 오버랩 되었다.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었다. 자신들이 끼고 살아가야 하는 질병보다도 더 흉측한 존재였던 것이다." (본문 221쪽 중에서)다수와 소수가 뒤바뀐 세상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 굳어버린 생각에 리처드 매드슨은 의문을 던진다. 무엇이든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간단하게 '정상'으로 분류하는 우리의 발상에 대해서, 작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내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 관점이란 이야기의 절정으로 본문이 독자를 데리고 가는 어느 지점의 대사에서 스스로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 흡혈귀들이 주류가 된 사회에서, 단 한 명의 인간인 네빌 박사에게 흡혈귀들이 뱉어낸 절규와 외침은 "저 괴물을 죽여라!"였던 것이다.
그 대사를 읽는 순간, 미처 거기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던, 머릿속에 우두커니 서 있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1억의 흡혈귀'에게 있어서 '1명의 인간'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신들과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네빌 박사가 끊임없이 자신들을 죽이려 해가 뜨면 사냥을 해대니, 그 두려움은 오죽했겠는가. 관점을 바꾸는 순간, <나는 전설이다>의 네빌 박사는 흡혈귀들에게 있어서 '괴물'이었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전설'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리처드 매드슨이 자신의 소설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식전환의 매개체는 '다수와 소수가 뒤바뀐 세상'이었던 셈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소수인 존재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우리는 정상"이라며 안도감을 느끼던 순간이 '홀로 남은 막막함'으로 대체되는 순간의 공포. 사람들이 쉽고 흔하게 느끼던 우월감의 밑바탕이 사실은 그저 수적 우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소설은 '흡혈귀와의 대결'이 그려내는 공포를 넘어서 더 넓은 생각으로 열린 문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15회 '성소수자 축제'에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