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비 오름 중턱에서 마주친 산담과 무덤을 지키는 귀여운 동자석.
김종성
오름의 여유는 그 능선의 부드러움에 있다.땅에서부터 시작한 능선은하늘을 향해 쉬엄쉬엄 가듯이 오르다가,다시 오름의 정상에서 내려오면서옆으로 흘러 들판으로 사라지는가 하면,어느새 숨바꼭질 하듯이 다시 나타나다른 오름을 만들어낸다.- 제주시인, 현길언빽빽한 숲과 잣담 곁을 지나다 보면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쫄븐 갑마장길의 두 번째 오름인 따라비 오름길이다.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 오름'처럼 이름이 무척 생소하고 이질적이지만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따라비란 이름은 '땅할아버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비오름 주위로 모지오름과 새끼오름, 장자오름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한 가족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꼭대기까지 이어진 오름 산책로를 절반쯤 올랐을까, 숨이 차올라 잠시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봤다. 크고 작은 오름 들과 바람개비들, 드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지에서 가져온 답답한 마음의 체증이 시원하게 씻겨졌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흐릿하게나마 한라산이 보인다. 따라비 오름은 이렇게 풍광도 좋지만 오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인상에 깊게 남는 곳이다.
오르며 내리기를 거푸하는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굼부리(분화구) 세 개가 어울려 하나의 오름이 되었다. 동행이 없는 나는 능선을 걷는 내내 마음속으로 여러 번 탄성을 쏟아내었다. 제주 설화에 나오는 제주의 거신 설문대 할망이 치마로 흙을 나르면서 한 줌씩 새어나온 게 봉긋봉긋한 오름이 되었고, 그 가운데 너무 도드라진 오름을 주먹으로 툭 쳐서 누른 게 굼부리라니 재미있다.
오름 중턱의 한 봉우리에서 '산담'과 마주쳤다. 산담은 무덤을 둘러쌓아 올린 제주의 돌담을 말한다. 산담 안에는 돌로 낮게 쌓은 제단과 함께 무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동자석 두 개가 서있다. 살짝 미소 짓는 동자석의 표정이 너무 천진난만해서 무덤이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귀여운 동자석이 지켜서 있는 무덤을 통해 제주도 사람들의 삶도 엿볼 수 있었다.
망자는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나 오름에 기대어 텃밭을 일구고, 방목을 하며 한평생 살다가 죽은 후 이렇게 오름 언저리에 묻혔을 것이다. 제주민의 삶이 얼마만큼 오름과 가까운지 잘 보여주는 무덤이었다. '제주도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을 파먹고 살다가 죽어서는 오름 자체가 되는구나···' 그래서일까 장쾌하고 멋져 보이던 주변의 평원과 오름 풍경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천천히 오르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급히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양보하려고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꼬리가 힘차게 말려 올라간 백구 한 마리였다.
'자전거도 안 탔는데 왜 날 쫓아오지?' 내 엉뚱한 의문에도 아랑곳없이 백구는 혀를 쑥 내밀고 헥헥거리며 성큼 앞서 올라갔다. 녀석은 몇 발작을 올라가다 잠시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뒤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정말 뒤로 등산복 차림의 어느 여성이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개가 길을 다 안내하고 참 영특하네요"했더니 자기가 주인이 아니란다. 가시리 마을에서 민박을 하고 따라비 오름으로 향해 가는데 마을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왔단다. 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름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자기도 신기하다고.
이웃 블로거 친구가 제주의 아우섬 우도를 한 바퀴 걷다가 동네 개가 내내 졸졸 따라와 덜 심심하고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질이 사나운 개는 묶어서 집을 지키게 하고, 순한 개는 방목해서 키우기도 하는 제주에서 일어날법한 일이다. 바퀴(자전거 여행자)를 보면 짖어 대지만, 힘들게 두 발로 걷는 여행자에겐 가이드까지 해주는 백구가 얄밉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