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지방선거, 직접 개표 참여해 보니

등록 2014.06.06 14:04수정 2014.06.0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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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4 지방선거에는 일반 시민들도 개표 사무원으로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본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나는 직접 개표 사무를 체험해보고자 이에 지원했다. 개표사무원은 해당 구청 선거관리위원회의 '추첨'으로 선발되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했다.

내가 지원한 서울시 마포구 개표소의 경우 개표사무원의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몇몇 젊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50대 이상이 가장 많았다. 50대 이상의 여성 일반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으나, 같은 나이대의 남성들도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60대 이상 노인과 20대 젊은 층은 비슷한 정도로 적었다.
 
홍익대학교 체육관에서 진행된 마포구 개표 작업의 경우, 10여 개의 개함부와 집계·심사부가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 배정되었는지는 당일 4시 이후 알 수 있었고 선관위의 임의 지정으로 자리 이동은 불가했다. 나는 제 8개함부에서 투표용지를 색깔별로 분류하는 일을 맡았는데, 내 왼쪽 옆으론 50대 아저씨가, 오른쪽 옆으론 70대 할머니가 앉으셨다. 가족 단위로 함께 지원해 선발된 경우도 있었으나 서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배치된 듯 했다. 대략 300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가 체육관을 빽빽이 채웠다.

나는 만일 개표과정에 불법이 있다면 내 두 눈으로 직접 찾아내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지만 개표과정에서 불법이 자행되기는 어려워보였다. 우선 총 7장이나 되는 투표용지를 분류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 개함부마다 20여명 남짓한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개표를 원활히 진행하기에 그 두 배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 오듯 쏟아지는' 투표용지를 마주해야 했다. 누군가 개표를 하며 모종의 불법을 저지르리라 마음먹었다 했더라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도장이 1번에 찍혔는지, 2번에 찍혔는지 일일이 구분할 새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개표 중 불법이 행해지기 어려운 주된 이유로는 시민들의 '자발적 상호감시'를 꼽을 수 있다. 한 동의 개표함을 참관인 감시 하에 펜치로 뜯으면 수천 장의 투표용지가 사무원들이 늘어서 있는 긴 탁자 위로 쏟아진다. 이 때 자칫 종이가 발밑으로 떨어지기 쉽기에, 개표함을 뜯을 때면 사람들이 투표용지에 '몸을 던져' 분실을 막아내기도 했다.

개표 중 옆에 앉은 사무원이 바닥으로 뭔가를 떨어뜨리면 혹시 그것이 투표용지가 아닌지 자리에서 일어나 살펴봐 주기를 요구했다. "샅샅이 살펴보세요. 이 사람들한테 한 표, 한 표가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학교 수업으로도 배우기 어려웠던 '한 표의 소중함'이 마음에 콱 박혔다.

긴 시간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힘겨움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수다를 택했다. 옆자리에 배정되었단 이유로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게지"라며 친근감을 표한 사람들은 개표를 하는 도중 모든 후보자에게 도장을 찍은 무효표가 나오면 "싹 다 뽑고 싶었나보네 그래", "착한 사람인가봐" 라며 서로 말을 건넸다. 무효표 중에는 자필로 '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줬다고 투표를 해야합니까' 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것도 있어 개표사무원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다.

'특이한 무효표'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튼 사람들은 서로 아들 자랑, 딸 자랑에서부터 어느 식당이 진짜 맛집인지 설왕설래를 거쳐 저마다 누가 당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 또한 나누었다. 내 옆의 70대 할머니는 '새누리당'에 표를 줬다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토로했는데, 그 옆의 40대 아저씨는 '민주당(새민연)'을 지지한다며 박 대통령에 대해 언성을 높였다.


물론 "누구에게 표를 줬는지 잊어버렸다"며 자신의 의견을 비밀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와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함께 개표하고 있다는 점 또한 서로 자발적 감시를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개표장에는 개표사무원 뿐 아니라 수많은 참관인들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들은 투표용지에는 손을 댈 수 없는 대신 개표사무원 바로 뒤에 서서 지켜볼 수 있어서 개표를 하기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관인 각자의 명찰에는 추천인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개표사무원 뿐 아니라 참관인 상호 간에도 감시가 가능해 보였다. 또한 이곳저곳에서 개표 상황을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에 불법이 개입할 여지가 매우 적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일반시민들이 개표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은 훌륭하지만, 개표사무원에 대한 처우는 분명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시민들은 오후 4시까지 개표소에 와 나눠 받은 식권으로 학생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후 자정 가까울 무렵 동안 아무런 간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가 그 돈 조금 벌자고 이거 하는 겁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있는 겁니다"라며 자부심을 보였던 사람들은 7시간동안 물밖에 제공되지 않자 "돈도 적게 받고 힘들게 하는데 대우가 뭐 이렇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돈 벌기 진짜 힘드네." 개표작업을 하는 동안 이곳저곳에서 가장 많이 쏟아진 말이었다. "약값이 더 들게 생겼어. 두 번은 못 하겠다"는 말도 이어졌다. 자정 무렵 1차 개표를 마친 후 제공된 건 낱개로 포장된 떡과 미지근한 식혜였다. 당일 자정까지로 적혀있던 유통기한에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의 간식 시간 이후 '늦어도 3시'에는 귀가하리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무참히 저버리고 개표작업은 새벽 4시 반까지 진행 되었다.

서로 활기를 북돋우던 수다는 사그라지고, "10만 원이 뭐냐, 20만 원은 받아도 모자라겠다"는 원성만 불쑥불쑥 터져 나왔다. 개표 도중 60대 이상 할머니들이 힘에 겨워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보고만 있기에도 마음이 아팠다.

그나마 개함부는 작업이 끝나는 대로 귀가할 수 있었지만, 집계와 심사를 맡은 사무원들은 동이 틀 때까지도 개표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개표가 아침 신문이 나올 때까지도 모두 완료되지 못한 건 '꼼꼼한 확인' 때문이라기보다 애초부터 개표에 투입된 개표사무원의 절대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직 첫 차가 다니지 않는 새벽 무렵에 많은 여성과 노인들을 무작정 귀가하도록 한 것 또한 개선 방안이 필요해 보였다. 아무리 국가적 큰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지만, 이대로라면 다음 선거 때에는 일반인 개표사무원 지원자가 현저히 낮아질 것이고, 불법이 틈탈 여지 또한 커질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선거 개표의 질을 높이는 방안 또한 마련되길 바란다.
#개표 #선거관리위원회 #지방선거 #개표사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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