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12. 19. 조선일보 사설조선일보의 이 사설은 역설적으로 노무현 지지자를 결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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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대통령 선거 투표일 아침, 많은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를 돌립니다. 너도 나도 투표를 독려하면서(현행 공직선거법 제 58조 제 1항 제 5호에 따라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 없이 투표참여를 권유하는 행위'를 선거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투표일 당일에도 투표참여 권유 행위는 가능하다) 노무현을 구한 것이지요.
같은 시각, 이회창 캠프는 무척 낙관적이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진 것은 이해가 될 구석이 있지만 노무현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정몽준의 단일화 파기 결정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캠프는 달랐습니다. 광주대첩, 후단협의 흔들기, 김민석의 탈당, 정몽준 단일화 파기 등에서 캠프와 구성원들이 몸소 체득한 건 '긴장'이었습니다.
2012년의 낙관론과 실패 2012년에 들어서면서 진보 쪽 사람들의 마음은 들떴습니다. 최초로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선거의 해'이자 '정권교체의 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1년 전인 2011년 4월 봄 재·보궐 선거에서 '천당아래 분당'이라는 곳에서 손학규가 국회의원으로, 보수적으로 유명한 강원도에서 최문순이 도지사로 당선되었고, 10월 26일 재·보궐 선거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무소속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당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의원 전·현직 비서들이 재·보궐 선거 전날 만나서 소위 '선관위 디도스 공격' 모의까지 한 것이 다 밝혀진 터라, 2012년 진보진영의 상황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았습니다.
4월 총선에서 야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12월 정권교체를 이루게 되면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숱하게 벌어진 비리, 협잡, 음모, 탄압 등 손꼽히는 문제점들을 다 정리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실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라며 긍정적인 해석을 했으며 야당 역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잔뜩 긴장한 여권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광고쟁이 '조동원'을 영입해서 홍보위원장으로 앉히고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로, 당 상징 색깔을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풀어져버린 야당과 긴장한 여당의 대결이 된 것입니다. 결전의 4·11 총선에서 그 결과는 나왔지요. 전국 투표율 54.2%, 새누리 152석 과반 달성, 승! 많은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대선에서의 복수를 다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