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하는 일본군. 서울시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100년 전 상황을 지금 상황에 빗댈 수 있느냐? 지금의 한국이 100년 전보다 훨씬 더 강한데, 설마 그때처럼 또 당하겠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100년 전의 조선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청나라와 일본은 서양의 침공을 받고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조선은 서양과의 전쟁에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았다. 조선은 청나라의 중재 하에 평화적인 방식으로 미국·영국·독일 등과 국교를 체결하고 시장을 개방했다.
또 조선은 패전이란 형식을 통해 멸망하지 않았다. 조선은 우리 측의 표현을 빌리면 '강점'을 통해, 일본 측의 표현을 빌리면 '합병'을 통해 멸망했다. 만약 조선의 국력이 훨씬 더 약했다면, 일본은 점령이란 형식을 통해 조선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또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면서 고종·순종 황제의 기존 지위를 상당 부분 승인했다. 고종과 순종을 각각 이태왕(李太王) 및 이왕(李王)에 책봉한 것이다. 황제의 지위는 박탈했지만 군주의 지위만큼은 인정해준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전쟁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 년 전의 조선은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무기력한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고종이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시장과 문호를 활짝 개방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이 "우리 허락 없이 일본군이 들어올 수 있겠느냐?"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듯이, 고종도 그런 식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다가 나라를 잃은 것이다.
100년 전의 조선이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니었는데도 멸망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역시 그런 위험성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상황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임오군란 틈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오늘날의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명분으로 한국의 동의 없이 한반도를 침략할 수 있다는 점은,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개입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임오군란 6년 전인 1876년에 일본은 조선과 함께 강화도조약(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을 체결했다. 이 조약 제1조에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제1조는 "동등한 예의로 서로 대하며 침략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제1조는 일본 측의 요청을 반영한 조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규정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불침략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공언은 공염불이었다. 6년 뒤 조선에서는 구식 군인들이 시장개방정책(이른바 개화정책)을 반대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임오군란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수도 한성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고, 이 와중에 일본 군사교관인 호리모토 레이조 소위가 피살당했다. 또 일본 상인들의 상권 장악에 불만을 품은 조선 군중이 한성 서대문 밖의 일본공사관을 포위하고 항의시위를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하나부사 요시타다 일본공사는 시위대의 포위망을 뚫을 목적으로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나서 시위대가 우왕좌왕하자, 하나부사는 그 틈을 타서 인천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인천부사 정지용은 하나부사 일행을 보호하고 인천부 청사에 이들을 수용했다. 인천부사의 태도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겠다는 조선 정부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하나부사는 이것을 국제 쟁점으로 비화시킬 목적으로 서둘러 출국을 강행했다. 자기 스스로 조선에서 쫓겨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관과 일본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 군대가 자국 공사관과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벌일 수 있다는 내용은 강화도조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본은 군대를 파견했다. 또 전면전에 대비해서, 대마도와 가까운 후쿠오카에 별도의 군대까지 대기시켜 놓았다.
이 같은 행동은 오늘날로 치면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와 유사하다. 조선에 변란이 발생한 것을 빌미로 조선군과 함께 사태를 진압하겠다면서 일본군을 파견했으므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개입을 명확히 거부했다. 일본 군대가 들어오자 철군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개의치 않고 조선에 들어왔다.
참고로, 일본군은 그 뒤 조선 정부를 장악할 목적으로 한양까지 침투했다. 하지만 고종의 요청을 받고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를 먼저 장악하는 바람에 뜻을 성취하지 못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의 파병 거부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