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혈서유린의 선정비 받칠돌에 새겨진 성혈
하주성
지금의 화성시 남양동이 당시는 남양도호부라고 하는 화성유수부로부터 독립된 지방 고을이었다. 정조는 상대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총융청의 병사들을, 서유린의 주청에 의해 화성유수부로 편입을 시킨다. 이로써 화성 인근 5읍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이 화성유수부에 속하면서 이곳에 있는 부대 역시 장용외영으로 모두 속하게 됐다.
특히 용인과 진위, 안산의 3읍 협수군 12초, 새로 이속된 시흥, 과천 속오군 5초, 안산과 시흥 장초군 2초, 용인, 진위, 안산 수어아병 8초 등, 도합 27초 병력을 확보해 기존의 화성유수부의 병력과 합쳐져 42초로 조선 최대의 정예부대가 됐다. 당시는 군제는 1초에 125명으로 이뤄졌으니 화성을 지키는 군사가 무려 5250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게 된 것이다.
1800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를 하고자 화성 행궁으로 행어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부른다. 정조는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서유린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조는 화성을 만든 목적을 설명한다.
정조는 농업의 활성화 등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그것을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환궁을 한 정조는 28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 유수인 서유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