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2일 오전 경북 구미 KEC 공장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2012 경북지역 도보순회투쟁'2일차 행진에 앞서 KEC지회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노동과세계 이명익
그러나 150억 손해배상 가압류에 어용노조를 만들고, 노동조합 간부 몇몇을 감옥에 보내면 고분고분해질 거라 생각했던 노동자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경조사 때만 방문했던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였던 KEC 노동자들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노동조합이 우선인 노동자들로 변해갔다. 또한 회사의 말도 안 되는 탄압에 맞선 싸움을 질기게 이어나갔다. 아주 격렬하게 싸움을 이어가지는 않았단다.
여성 조합원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심각한 투쟁보다 즐겁게 투쟁하는 것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조합원 전체가 율동을 배워 칼 군무를 한다던지, 공장 정문 앞에서 노래방 기계를 가져다 놓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 제끼기 일쑤였단다.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도 안 되자 2012년 2월, KEC 자본은 결국 정리해고의 칼날을 빼어들었다. 매년 흑자였던 회사가 경영상의 위기라고 선언하면서부터 갑자기 정리해고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가짜위기가 생겨났다. 갑자기 생겨난 그 위기에 민주노조에 속한 노동자 75명만 정리해고를 예고했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생기는 돈으로 회사 임원과 관리자들의 임금을 매년 7%씩 인상하겠다는 내부문건이 발견됨으로써 사람들을 또 한 번 경악게 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회사는 뻔뻔하게도 임금삭감에 동의해 주면 정리해고를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짜맞춘 듯 어용노조는 무급휴직과 상여금 300% 임금삭감이 포함된 노사합의에 동의해주고 만다. 그러나 회사는 곧이어 2012년 2월 24일, 민주노조 75명의 노동자들만 보란 듯이 정리해고 한다. KEC노동자들은 공장 안팎으로 정리해고싸움에 물러서지 않았고 미친 회사에 맞서 더 미치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미친 자본에 맞서 싸울 때 노동자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임금도 삭감하고 정리해고도 자행한 KEC 자본은 2012년 5월, 노동자들의 물러섬 없는 투쟁에 놀라고, 불법적인 정리해고로 인해 법적으로도 궁지에 몰리자 돌연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애당초 계획했던 임금삭감에 만족한다. 그렇게 자본에게는 무조건 양날의 보검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모든 것을 빼앗는 정리해고가 철회되었다.
그리고 2014년 3월 다시 148명의 정리해고를 예고했다.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임금삭감만 한다면 정리해고를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먼저 놨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용노조도 선뜻 동의해주지 않는다. 회사의 주장대로 임금을 삭감한다면 그 임금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KEC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조합원에게 임금삭감을 받아들이지 말라 호소했고 어용노조는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통한 파업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회사는 2014년 4월 17일 어용노조를 포함한 148명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그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KEC노동자들의 눈빛에는 해고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 쌍용차 해고자인 나에게 해고란 늘 관계의 단절과 죽음으로 향하는 출입구 같은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해고란 마냥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질기게 싸우면 넘을 수 있는 문제인 듯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해고당하는 날, 가당치 않게도 결의대회가 아닌 '봄 소풍'을 제안했다. 절박하게 싸우고 싶지 않더란다.
해고가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계속 존재한다면 해고에 맞선 우리들의 싸움은 앞으로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나 같은 해고자들 그리고 해고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이들이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이 땅의 정리해고를 없애자는 취지의 봄 소풍을 함께 하자고 이야기했다. 정리해고, 이게 원래 말도 되지 않는 거 아니냐고, 이참에 확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냐고. 참 발칙하지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봄이다. 산과 들에서 품어내는 꽃들의 자태에서 '완연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봄내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라 확신하는 KEC노동자들을 통해서 진짜 봄을 느꼈다. 노동자들의 봄은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4월 17일 대한문 오전 9시에 노동자의 봄을 함께 만들 당신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