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모양 자연석 얼굴모양 자연석인데 ‘서투른’ 돌챙이가 새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제주사람들의 얼굴, 민중의 얼굴은 아니다.(김영갑 갤러리에서 촬영)
김정봉
제주에서 민중의 얼굴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700년대. 이즈음 육지에서는 민중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불교와 유교에 의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속신앙의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육지에서는 민중이 자신들의 얼굴이라 여기며 돌장승을 세웠고 제주에서는 돌하르방과 동자석을 만들었다. 민간신앙이 강하여 불교가 깊숙이 뿌리내리지 못한 제주여서 육지에서 불어오는 '장승바람'은 봇물 터지듯 퍼져 나갔다.
그동안 미숙련 석공으로 남아 있던 돌챙이들은 육지의 장승에서 힌트를 얻고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제주민중, 자신들의 얼굴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미숙련 석공'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민중의 얼굴이 태어나게 되는 밑바탕이 된다. 어설프고 서투르고 기교를 부릴 줄 모르는 돌챙이들은 돌하르방과 동자석 등 여러 석상에 갖가지 자신들의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돌하르방과 '친척들' 벙거지모자 쓰고 툭 튀어나온 눈에 한쪽어깨는 올라가고 꾸부정한 자세로 서있는 돌하르방, 가는 곳마다 눈에 띄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애초에 만들어진 건 총 48기,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성문 앞에 세워졌다.
장승이나 돌하르방 모두 경계수호 역할을 한다. 장승이 마을 주민의 주도로 마을 어귀에 세워져 신앙적 기능이 강한 반면 돌하르방은 관 주도로 성문 앞에 세워져 성 밖을 경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관이 민간신앙을 포용한 케이스다.
이렇게 보면 방사탑 중에 인물상을 위에 올린 거욱대가 의미면에서 육지의 돌장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둘 다 관이 아닌 민간이 주도하였고 마을을 수호하는 민간신앙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돌하르방은 돌장승과 사촌뻘이고 거욱대 인물상은 돌장승과 이복동생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