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 씨가 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정부로부터 지급받은 배상금 23억 원 가운데 13억 원 정도를 반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대법원이 우리를 또 두 번 죽이는구나. 과연 우리는 어느 나라 나라 사람이냐"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유성호
그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될 때 돌도 채 지나기 전이었던 막내 아들은 상처가 클 수밖에 없었다.
"나와 보니 초등학생이더라. 그런데 아버지가 벌써 거기(교도소)를 다녀와서 정상인이 아니지 않나. 아이들도 충격을 받고, 그런 갈등 때문에 막내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6개월 다니다 그만 두고 포항공대로 갔다. 거기서도 밖으로만 돌더니… 사회에 적응을 못했다.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데 들어갔다가 또 관두고, 그러면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공교롭게도 인터뷰는 39년 전 대법원이 그에게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한 날 이뤄졌다. 조곤조곤한 말투, 아담한 체구의 이씨에게선 학자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그 일이 없었다면 계속 공부를 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씨 자신 역시 아들처럼 불면증과 대인기피증이란 멍에를 지고 살아왔다. 아니, '아들도 아버지처럼'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간첩이란 낙인은 그에게 취업 기회도 주지 않았다. 빚을 내 학원을 차렸지만 애를 먹었다. 이씨는 처음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허위자백을 했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이 내용을 부인하자 중정 요원은 그를 지하실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정신적인 부분이 망가져버린" 이씨는 학부형들을 대하기 어려웠다. 괜스레 가슴이 뛰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학원을 정리하고 1987년 양평군으로 이사했다. 2008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에야 그의 상처에는 조금씩 새살이 돋았다.
"예전에는 어디 다녀오면 주변 사람들이 '김정일 만나고 왔어?'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그 말 한 마디가, 겉으로는 허허 웃고 넘겨도, 마음을 건드렸다. 그럼 며칠 동안 아팠다. 무죄 판결 받고 나서는 그런 농담도 없어지고, 사회생활하면서 '나도 무죄 판결 받았어, 민주화운동 공로자야'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 다음부터 사람답게 살았다. 비로소 내가 정상적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구나 생각했다."다시 찾아온 악몽... 또 국가 때문이다 그렇게 회복하던 그가 요즘 다시 아프다. 악몽에 시달린다. 이전처럼 땀을 흘리고, 마음을 추스르기도 힘겹다. 또 국가 때문이다.
부당이득금 반환소송 1심 결과에 불복, 항소를 했어도 심란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씨는 "나도, 집사람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왔지만 남에게 줄 것 못 주는 삶은 처음이다. 빚을 졌으니까"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참담하다"는 말도 했다.
지난해 10월 24일 다른 피해자들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 때 초등학교 6학년 손녀는 박근혜 대통령 앞으로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청와대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원망스럽진 않냐'는 질문에 그는 또 한 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됐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며 시선을 먼 곳에 뒀다.
[일문일답 전문 ①] "도살장에 끌려가던 날, 내 정신은 망가졌다"[일문일답 전문 ②] "반환소송... 국가가 이렇게까지 가혹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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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억 중 13억 토해내라니... 대법원은 인혁당 피해자들 두 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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