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고문·고작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법살인'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2013년 10월 24일 오전 청와대 부근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 취하'를 요구했다.
권우성
2013년 7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사건 피해자 16명과 그 가족들 앞으로 하나 둘 소장이 도착했다. 원고 '대한민국'에게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과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라는 이름으로 고문·조작 등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국가는 2008년에야 재심 무죄로 잘못을 인정하고, 이듬해 위자료도 지급했다. 그런데 이 돈 일부를 돌려달라는 것이다. '법'대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법'은 대법원의 '셈법'이었다. 2011년 1월 27일 대법원 1부(주심 민일영 대법관)와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인혁당 재건위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16명과 그 가족 61명이 청구한 국가배상금의 이자(지연손해금) 계산법을 바꿨다.
이전까지 법원은 고문 등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금을 계산할 때 '그 행위가 종료한 날짜'부터 따졌다. 그런데 이때 대법원은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경우,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있다"며 이자 기준일을 손해배상소송 2심 변론종결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그해 1월 13일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의 재판 때부터 같은 논리로 이자 계산법을 변경, 국가배상금 규모를 축소했다.
결국 이자 기준일은 30여 년씩 뒤로 밀려났다. 전창일·강창덕·라경일·김한덕·김종대·황현승·이창복·임구호·이태환·유진곤·조만호·전재권·정만진·이재형 선생과 그 가족의 이자 기준일은 과거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1975년 4월 9일에서 2009년 11월 5일 또는 13일(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 됐다. 만기출소일(1979년 6월 27일)을 기준으로 삼았던 이현세 선생 쪽도, 형집행정지 특별사면을 받은 날(1982년 12월 24일)부터 계산했던 이성재 선생 쪽도 이자 기준일이 2010년 7월 2일로 바뀌었다.
이로써 피해자와 가족들이 받아야 할 국가배상금 규모는 763억 원에서 280억 원으로 대폭 줄었다. 그런데 이미 피해자들은 2009년 6~7월 손해배상소송 1심에서 이긴 뒤 법무부에 가지급을 신청, 그해 8월 배상금(위자료 원금 + 이자) 중 3분의 2에 달하는 491억 원을 먼저 받은 상태였다. 국가배상금 최종 확정액보다 가지급금의 규모가 더 커져버린 것이다.
국가의 돌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