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그라트 시절에 각광받은 칭화대의 옛 정문주룽지, 후진타오는 물론이고 시진핑을 배출한 칭화대는 테크노그라트가 각광받는 시절에 가장 높은 주가를 달렸다
칭화대학홈페이지
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 안에 스토리가 별로 없다. 2003년 자리를 받았지만 상무위원회를 장악한 장쩌민 계열의 위세를 꺽을 수 없었다.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들이 장악할 수 있는 권력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앞선 지도자들의 자식이나 식솔들은 국영기업체를 비롯한 알자배기를 얻었지만 후진타오나 주변 사람들이 큰 이권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잘 못듣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당대 중국 정치의 당파라고 할 수 있는 칭화파(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그룹)와 공청단(공청단 출신의 엘리트그룹)을 대표한 맹주였지만 태자당(공산당 간부의 자제그룹)이나 상하이파(상하이에서 간부를 지낸 지도자그룹)에 속하지 못한 후진타오의 정치 여정은 그렇게 꾸며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림자 지도자의 한계에 대한 염증과 더불어 자신의 뒤를 잇는 시진핑은 그런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바라는 이유에서도 국가 주석과 동시에 군사위 주석까지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진타오의 존재감 덜한 10년이 지나고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인물은 시진핑이다.시진핑 역시 후진타오처럼 전형적인 지도자 코스를 밟고 왔다. 1975년 칭화대학을 졸업한 후 국무원 반공청과 중앙군사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일찌감치 지도자 그룹을 접했다. 이후에는 우리나라 부군수에 해당하는 직위로 일했고, 1999년에는 푸젠성 성장까지 올랐고, 2002년에는 저지앙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저지앙 당서기에 오른 그는 천량위가 배임사건으로 빠진 상하이에 들어가 짧은 시간 동안 서기를 하다가 다음에는 상무위원으로 선발됐고, 중앙당학교 교장을 맡았다. 2008년에는 차기가 예정된 부주석으로 선발됐고, 2013년 국가주석이자 총서기를 물론이고 군앙군사위 주석까지 받으면서 명백한 중국의 지도자가 됐다.
정치적 성장 과정은 후진타오와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후진타오와 그를 동급으로 보는 것은 큰 오류다. 우선 시진핑은 중국 당대 파벌들을 모두 관통한다. 아버지가 혁명원로이자 우리로 보면 국회부회장에 해당하는 전인대 부위원장과 중앙서기처 서기를 지냈다. 명백한 태자당의 일원이었다. 거기에 오랜시간 저지앙의 맹주로 있다가 상하이 당서기까지 지낸 것은 상하이방의 비호를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진핑의 힘을 더 실어주는 것은 당대 정치의 거목인 장쩌민 역시 이미 연로한 상황이고, 그를 둘러싼 세력 역시 자연스럽게 차기 지도자를 바란다는 점도 그를 유리하게 한다. 시진핑의 부인인 펑리위안은 군대에 적을 둔 연예인으로 군대에 막강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도 군부 역시 시진핑에게 힘을 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