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조광조>. 배우 유동근이 조광조를 연기했다.
KBS
건국 90주년이 된 조선왕조가 삐걱거리던 1482년, 조광조는 한양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과거시험보다는 정치변혁에 관심이 더 컸던 그는 26세 때였던 1507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가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훈방되었다. 동지들은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명문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1507년은 쿠데타군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 임금을 옹립한 중종반정(1506년)이 벌어진 이듬해였다. 조광조는 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새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뒤 혁명보다는 개혁으로 선회한 조광조는 과거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는 29세 때인 1510년에 과거시험 소과(小科)에 장원급제하여 진사 자격을 취득한 뒤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학내 개혁운동을 벌이다가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이마저도 잘 피해나간 그는 서른네 살 때인 1515년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발을 디디게 된다.
급제 직후의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관직을 거친 조광조는 적성에 맞는 관직인 사간원(지금의 감사원 기능을 부분적으로 보유) 정언에 임명된다. 임금을 상대로 국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자리는 언변이 탁월한 그에게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 뒤, 조광조는 가슴속에 숨겨둔 개혁의 칼날을 꺼내든다. 자신이 속한 사간원 관료들뿐만 아니라 사헌부(지금의 검찰청 기능 보유) 관료들까지 전원 교체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린 것이다. 신입 관료가 올린 이 상소는 조정 전체에 메가톤급 충격을 가한다.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중종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킨 쿠데타 주역들그로부터 9년 전, 연산군의 12세 연하 이복동생인 중종은 쿠데타 주역들의 추대로 임금이 되었다. 그런데 훈구파로 불리는 이 쿠데타 주역들은 중종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켰다. 중종의 부인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중종의 부인은 연산군의 인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씨와 이혼하게 된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궁에서 쫓겨난 신씨는 무언의 1인 시위를 되풀이했다. 남편과 세상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자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곤 했던 것이다. 피켓 대신 치마를 1인 시위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이 바위는 그 후 치마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
중종은 신씨와 재결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연산군을 부정하고 훈구파를 긍정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연산군의 인척이자 훈구파의 적인 신씨와의 재결합은 정치적으로 손실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중종반정을 성사시킨 주역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면서 훈구파의 힘이 조금씩 약해졌다. 이런 상태에서 반정 9년 뒤인 1515년에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개혁세력인 사림파는 중종과 신씨의 재결합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림파의 진짜 목적은, 신씨를 왕비로 만드는 것보다는 훈구파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총대를 멘 사림파 관료가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신씨를 왕비로 맞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런 상소는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반정 덕분에 출세한 사람들은 박상·김정을 위험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훈구파를 대표해서 총대를 멘 인물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 이행이었다. 이행은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권민수를 움직였다. 이행과 권민수는 각자 자기 조직을 움직여 박상·김정에 대한 탄핵과 처벌을 주도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박상·김정에 대한 집중 포화를 개시한 것이다. 결국 박상·김정은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간원에 입성한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