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꽃> 까메오 명단
임채도
(※ 진행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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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간첩사건 타임라인 ⓒ 인권의학연구소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될 즈음 중앙정보부 공작과는 재일공작망을 통해, 재일민단 소속으로 유신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던 사업가 이OO에 대한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재일민단은 1971년 민단장 선거과정에서 유신과 반유신파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있었고, 중정의 개입으로 유신지지파가 당선되어 유신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정은 민단 내 유신반대파의 이OO을 '간첩'이라고 전제하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역용 공작을 진행했다.
하지만 후에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이지만, 울릉도사건에서 '간첩총책'이 된 이OO이 간첩임에 대해 당시 일선에서 공작을 진행했던 중정 수사관들조차 그 근거를 대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재일교포 이OO씨가 조총련 소속 간첩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중앙정보부가 '재일간첩'이라고 발표한 이OO은 전라북도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사업에 성공한 재일 실업가였을 뿐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진행되던 비밀공작은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급진전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서둘러 2월 3일부터 한 달여간 전OO, 김OO, 전OO, 이OO, 이OO 등 관련자 수십 명을 모두 전격 연행하였다. 연행자들 가운데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부모 모두 끌려간 후 나이 어린 자식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방치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1960년대 초 북에서 내려온 조카를 만나 경제적 도움을 찾아 단순 월북했던 울릉도 거주 O씨 일가 몇 사람과 일본 유학 중 호기심에 북을 다녀왔던 유학생 한 사람에 대한 혐의가 전부였던 사건이 '통혁당 이후 최대'라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갑자기 왜곡되어 부풀려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발표하면서 재일 한국인인 이OO을 중심으로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울릉도와 전라북도 지역에서 각기 서울, 대구, 익산 등의 도시와 농어촌을 무대로 대학, 정당, 군에서 농어촌에 침투해서 공작활동을 하고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고 주장하였다.
전라북도 출신인 이OO이 "울릉도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OO과 사업적 교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울릉도 사람들과 전라북도 사람을 단일 사건으로 묶어 놓은 것이었다. 울릉도 사건으로 기소된 32명 중 전라북도 사람들은 12명인데 실제 이들은 울릉도에 가본 적도 없고 울릉도 관련 피의자 20명을 이전에 알지 못할 뿐 아니라 1974년 7월 재판받을 때 처음 보았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조직 규모만 부풀린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혐의 사실도 크게 부풀려 조작하였다. '재일 간첩 이OO'을 허구로 설정하고 유학이나 사업 관계로 이OO과 만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과 지연, 학연, 혈연 관계로 만난 모든 사람들을, 오직 수사당국의 주관적 판단과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근거하여 대규모 간첩단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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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 다섯개가 후두둑... 울릉도 간첩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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