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힘들어하는 거 다 봤으면서...
김지현
하…. 이래서 사람 말은 양쪽을 다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시계를 잠시 뒤로 돌려보자. 때는 바야흐로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 날은 몸도 마음도 쉬고 싶었다. 하여, 남편과 아이들만 시가에 보냈으면 했다.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남편이 출발하고 나서 시가에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오늘은 제가 꾀가 나서 애들하고 애들 아빠만 갔어요. 저는 다음에 갈게요."하지만 시가는 나의 휴식을 원치 않았다.
"그래 뭐…, 어쨌든 알았다. 그런데 내가 오늘은 아파." 어차피 싫은 소리 들은 거 다음에 갈까 했지만, 아프시다는 말씀에 마음이 약해져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가고 있는 남편을 되돌렸다.
남편은 화를 냈다. 하루쯤 쉬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불러낸다고 투덜거렸다. 내게 가지 말라고, 그냥 쉬라고 다독였다. 풋! 이 남자, 작전인지는 몰라도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좋아서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시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부지런히 저녁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렇게 내 편을 들어주던 이 남자가 안 보인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내 편을 들어주던 내 남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방, 저 방 둘러보니…. 이 남자, 따뜻한 흙침대 위에서 가랑가랑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 계신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침대 위로 올라가서 발로 차버릴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여긴 '그의 구역'이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일어나, 난 일하는데 지금 잠이 와?' 복화술로 말했다. 대충 상황을 눈치챘는지 남편이 일어났다. 본인도 본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괜스레 더 큰소리로 아이들과 놀아준다. 으이그…, 하는 짓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머니와 함께 부랴부랴 만두를 빚고 저녁준비를 마쳤다. 근처에 살던 사촌시누이 가족이 도착했다. '좀 일찍 와서 같이 좀 할 것이지….' 소심하게 남몰래 눈을 흘기고 저녁을 내왔다.
한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하루가 피곤해서 그런지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종로에 새로 옷 가게를 연 시누이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우리는 그 전 주에 가게 구경을 갔던 적이 있어서 남편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꼭 그래서라기 보다는 남편은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특히 시댁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 만두를 먹고 있었다.
"와이프 옷 한 벌 사주려고 했는데 거기는 '오피스룩'이라 와이프가 입을 만한 건 없더라고요." '뭐? 너 님 뭥미?? 이게 지금 말인지 막걸리인지' 고개를 숙이고 만두를 먹던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고 남편을 바라봤지만, 남편은 눈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니, 오빠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새언니가 직장 그만둔 게 애들 키우려고 한 건데. 애들 아니었으면 새언니 지금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인데."남편은 아차 싶었는지 이런 저런 부연을 덧붙인다. 아니 뭐 그런 뜻이 아니고 어쩌고…. 내가 가게 앞에서 '내 스타일이 아니네' 했었는데 그 말을 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고 이 남자야, 그냥 그 입 다물라!' [그 여자 이야기] 누구 때문에 사회생활 접었는데... 눈물이 왈칵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울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마다 아이들이 있어서 화장실로 숨었다. 화장실에서 들으니 남편을 나무라는 아버님 어머님 말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위로는 되지 않았다. 아니, 더 서럽기만 했다. 저런 남자를 남편이라고 한 이불 덮고 산 세월이 아까웠다. 내일부터 집에서 정장 입고 살림을 할까, 집을 오피스로 꾸며 버릴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둘째를 키우기 위해 사회생활을 접었다. 아이는 아토피가 있었는데 음식 알레르기가 있어서 아무 음식이나 먹으면 안 됐다. 뭐든지 내가 만들어 먹여야 했다. 둘째는 어린이집도 다니지 않았다.
이제 7살이 되는 큰애와 24시간 붙어 있는 작은 아이가 있으니 내게 혼자만의 시간은 사치가 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생활을 그만둔 나는 두려웠다.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시는 그 '오피스'에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아서 발버둥을 쳤다. 남편은 그런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봤다. 그런 남자가 오피스룩이 어쩌구 어째? 그 오피스를 벗어나서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뻔히 알면서, 뻔히 봐왔으면서.
화장실에서 나왔지만 저녁식사 자리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가자미 눈이 되도록 남편을 노려봤지만 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설거지는 아버님이 하셨다.
3월부터 둘째는 7살 누나와 손을 잡고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유치원 종일반에 보내고 '오피스'에 가려고 했지만, 종일반은 현재 엄마가 직장에 다니지 않는 경우는 받아주지 않았다.
남편은 여전히 그때 일로 할 말이 많다. 내가 화를 냈던 게 과했다고 생각한단다. 내가 그렇게 설명을 했건만 속으로는 내가 왜 화를 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해를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만 이야기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우리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수 이소라는 노래에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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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불 덮고 산 지 12년...이 남자가 날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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