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종의 명문에는 조선과 교류하였음이 자랑스럽게 적혀 있다.
노시경
이 언덕 위 넓은 마당 위에는 도모야(供屋, ともや)라는 종각이 있다. 종각 안에는 본래 세이덴(正殿) 앞에 걸려 있던 종이 있는데, 현재의 종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동양 여러 나라의 종들은 그 모양새가 나라마다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오키나와의 종은 우리나라의 종에 비해 조금 작고 길쭉하게 생겼다. 이 종의 이름은 아주 길다. 종의 이름은 반코쿠신료노카네(萬國津梁之鐘, ばんこくしんりょうのかね). 즉 이 종은 류큐가 여러 나라의 나루터와 다리, 즉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종에는 '류큐는 남쪽 바다의 아름다운 나라이며, 조선, 중국, 일본 등 만국의 가교 역할로 무역에 의해 번성하는 나라다'라고 적혀 있다. 여러 나라에 끼여 살았던 류큐의 역사답게 이 종에 많은 의미를 담고 싶었을 것이다.
종의 안내문에 여러 나라 중 유독 조선을 가장 앞에 둔 게 눈에 띈다. 류큐를 둘러싸고 있던 3국 중에 조선이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였고 문화 선진국이었던 조선과의 먼 해로를 따라서 교류를 했음을 과시하고 싶은 것 같다. 류큐는 사실 한때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해 왕성하게 교역하고 조선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해상왕국이었다.
폐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공간언덕마다 수많은 성문을 지났지만 복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코우후쿠몬(廣福門)이 또 나타났다. 이 목조문은 가장 큰 문 중의 하나이며 호적관리를 하는 동쪽 건물과 절 등을 관리하는 서쪽 건물의 한 가운데에 있는 문이다.
유난히 높고 넓어서 문이 마치 창고건물같이 보인다. 문의 검붉은 색상이 인상적인데 이 붉은 색의 왕성은 일본의 왕성보다는 중국 자금성 기와건물들의 색상을 연상케 한다. 코우후쿠몬만 지나면 드디어 슈리성의 세이덴(正殿)을 둘러싸는 주요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둘러본 슈리성의 구역은 무료 입장이지만 국왕이 살던 핵심구역인 세이덴(正殿)에 들어가려면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야 한다. 오키나와에는 신용카드로 결제하지 않고 현금으로 받는 곳들이 많은데, 이 세이덴 입장료는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했다.
그동안 일본 엔화 현금이 자꾸만 줄어들어 엔화 현금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에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일본 엔화를 아끼고 신용카드를 꺼냈다. 입장권을 사면서 한글로 된 슈리성 안내 팸플릿을 받아 정전 안에서의 동선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세이덴(正殿)에 연결되는 마지막 문, 보신몬(奉神門) 뒤로 드디어 왕이 살던 공간이 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보신문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다. 우리나라 왕궁과 같이 중앙의 문이 국왕이 드나들던 문이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가운데 문을 통해 세이덴 앞으로 들어섰다. 눈 앞에 폐쇄적이면서도 참 아름다운 광장이 펼쳐졌다. 이 정전 앞마당의 이름은 우나(御庭)이다. 슈리성 우나는 세이덴(正殿), 난덴(南殿), 호꾸덴(北殿), 그리고 보신몬(奉神門) 등으로 둘러싸여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높은 산위에 건물들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구조 속에 있어서 그런지 더욱 비밀스럽고 은밀해 보이는 공간이다.
우나 앞에 정면으로 웅장하게 자리 잡은 건물이 정전인 세이덴이다. 벽면과 기둥, 그리고 지붕 기와의 색깔이 온통 붉은색 일색인 것이 내 눈에 강하게 각인되는 것 같다. 세이덴은 중국 황궁의 화려한 건축양식과 일본의 간결한 건축양식이 혼합돼 독창적인 류큐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건물을 뒤덮은 붉은색은 중국의 영향이요, 기와 건물 1층의 전면 중앙에 전면을 바라보는 곡선의 기와지붕은 전형적인 일본 양식이다. 우리나라 서울의 왕궁 정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에 이 세이덴은 묘하게도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남국의 태양이 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쪽에 있는 중국을 바라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지형상 그렇게 만든 것인지 수수께끼다.
슈리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세이덴 전면에는 류큐 석회암으로 만든 돌계단이 있고 돌계단 양쪽 끝에는 용이 조각된 기둥 한 쌍이 우뚝 서 있다. 돌계단 제일 위 난간 끝에는 조금 더 작은 한 쌍의 용기둥이 서 있다.
곡선 지붕의 처마 아래에는 황금빛의 화려한 두 마리 용이 구름 속에서 중앙의 화염 보석을 마주보고 포효하고 있다. 세이덴을 장식하기 위해 곡선 지붕 중앙과 치미(鴟尾)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듯한 용머리 기와가 박혀 있다. 이 수많은 용들은 이곳이 류큐의 왕이 거처하고 일을 보던 곳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류큐의 왕은 슈리성의 용으로 남아 여기저기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키나와 여행의 하이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