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털한 시간강사였던 '그', 왜 그렇게 변했을까

[서평] 스탠리 아로노위츠의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등록 2014.03.26 11:18수정 2014.03.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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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양심적인 지성인이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와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이보다 뜨거워 보였다. 그는 사려 깊고 온화했다. 털털한 옷차림만큼이나 사람을 따뜻하고 편하게 해 주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20대 후반에 만난 어느 시간강사 선생님이었다. 모 대학 조교로 있던 시절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를 다시 만났다. 어느 대학에서 열린 교육 관련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그는 또 다른 모 대학에서 입학을 총괄하는 보직을 맡고 있었다. 그사이 정규직 정교수가 된 것이다. '감투'까지 썼으니 출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달라져 있었다. 깔끔하고 빈틈없는 입성만큼이나 그의 말 또한 명쾌했다. '까놓고 말해, 아이들을 일단 성적으로 보는 거죠.'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아이들을 평가할 때 쓰는 주된 기준이 무엇인지 묻자 돌아온 그의 대답이었다.

미국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본 우리 교육 현실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 죽은 학교 살리고 삶의 교육 일구는 교육 혁명을 향해>(스탠리 아로노위츠 저/오수원 역) 겉표지.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 죽은 학교 살리고 삶의 교육 일구는 교육 혁명을 향해>(스탠리 아로노위츠 저/오수원 역) 겉표지.이매진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의 변화(원래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지만)를 시간강사와 정교수 사이의 거리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스탠리 아로노위츠의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를 읽으면서 나는 왜 그를 떠올렸을까.

저자 스탠리 아로노위츠는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과 문화연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정치 활동가이자 문화 비평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미국 좌파 지식인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듯하다. 그는 1970년대 이래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학교 교육을 주제로 꾸준히 글을 써 왔다. 그 자신의 소개처럼, 학교 교육의 체계를 노동 계급 연구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환경에서 살아온 덕분이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학교 교육에 대해 총체적 환멸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뉴욕의 자유대학(Free University)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대안 교육을 만드는 데 참여한 이유다. 저자는 끊임없이 진보적인 관점에서 교육개혁의 화두를 안고 살아왔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저자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저자가 파헤치는 미국 대학, 미국 사회의 문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학은 실업 예비군과 노동력 생산 공장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가는 경제 위기와 양극화 부담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다. 학교는 졸업장 생산 공장이 되어, 그것을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야비한 장사꾼 노릇을 하고 있다.

1부('죽은 학교')·2부('삶의 교육')에 걸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의 일부를 보자. 나로 하여금 불현듯 '그'를 떠올리게 한 구절이기도 하다.


기업 대학이 출현하면서 이제 많은 교수들이 강의와 연구를 훨씬 더 이익이 되는 행정 보직 경력의 서곡쯤으로 여기고 있다. 대학의 기업화는 강의, 연구, 집필을 주된 업으로 삼는 동료 교수가 아니라 대학을 정치와 경제 체제 내부의 지배 세력에게 의미 있는 기관이 되도록 바꾸는 새 임무에 충성을 바칠 간부단을 필요로 한다. 이제 성공적인 행정 경력을 측정하는 척도는 학문적 리더십이 아니다. (147쪽)

대학 총장을 최고경영자(CEO)나 전문경영인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우리나라와 미국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그들에게 중요한 일은 기부금의 규모를 키우고, 연구 기금의 액수를 많이 확보하며, 국가의 예산 삭감에 저항해 더 많은 예산을 따내는 것이다.

저자는 150년 동안 어느 정도 국가에 통합된 미국의 대학 체제가,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이미지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사람과 사물의 생산과 운영에 관련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실용적 부속물을 곧 대학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반지성적 토양이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반지성적 토양이 정착된 사회에서 노동 계급의 젊은이들이 진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문제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노동운동과 좌파의 쇠퇴가 배경으로 깔려있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시대의 노동조합은 조합원들과 노동 계급의 이익은 물론 지적이고 정치적인 발전을 중시하는 운동이 아니라, 생존 업무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밖에 달리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서비스 업체하고 더 비슷하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일에 거의 참여하지 않으며, 지금도 또 앞으로도 노동조합을 통한 대안 교육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사기가 떨어진 채 사분오열한 좌파들은 쟁점 하나를 붙들고 운동하는 단체들의 혼합물이거나 선거 기계일 뿐이다. 잠재적 좌파는 고사하고 현직 활동가들만이라도 대안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좌파의 포부는 실천 의제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37쪽)

학교 교육과 교육을 혼동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저자는 학교 교육(schooling)과 교육(education)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학교 교육은 교과 훈련과 졸업장 체계를 통한 인력 양성 제도일 뿐이다. 학교는 세계나 아이들을 향한 애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요구와 반대로 사회·문화·직업적 위계에 순응할 것을 가르친다.

지금 이 세계에서 학교는 사상과 행동의 독립성을 장려하기는커녕 독자적인 사고조차 길러주지 못하게 구조화됐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학생을 위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원천도 아니다. (44~46쪽)

이런 학교 교육을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가 보기에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의 조건이 필요하다. 교과 과정을 지배하고, 교사에게 훈련 교관 노릇을 강요하고, 학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고부담 표준 시험을 폐지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구체적으로 학교가 기업의 이익에 연결된 끈을 끊고 진정한 지적 노력에 맞춰 교과 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존중하고, 계급에 상관없이 진정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돕고 싶어하는 진정한 지식인 교사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노동자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내용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유가 있다.

저자에 따르면 노동자 교육의 소멸과 약화는 노동조합(노조) 조직화의 후퇴를 보여주는 징후다. 저자는 몇몇 노조 지도자들이 숫자 놀음에 집착하며, 노조의 힘이 조합원 수에 달려 있고 다른 모든 부분은 부수적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저자가 보기에는 노조의 투쟁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노조 내부의 민주주의는 전혀 관심이 없는 노조 지도자들도 많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더 높은 협력을 초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드러내 놓고 옹호한다. 그러므로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에 편향된 교육 과정은 겉치레일 뿐이거나 최악일 때는 일반 조합원에게 '허황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217쪽)

교육이야말로 사회를 바꾸는 힘

그러나 저자는 교육이야말로 사회를 바꾸는 힘이라고 단언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교육(노동자 교육을 포함하여)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3부('교육혁명')에서 그려지고 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실천적 이론가를 통해 그 밑그림을 보여준다. '행동하는 사람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제목으로 살피고 있는 그람시의 교육 철학과 실천적 지식인, 책 제목이기도 한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로 소개하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해방의 교육학 등이 그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람시는 모든 자본주의 사회, 심지어 파시스트 독재 체제도 힘이 아니라 동의로 통치하는 경향을 띤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본 통제의 열쇠는 경제나 국가가 아니라 공공 생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성취하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했다.

저자가 보기에 그람시의 교육 사상은 (교육-기자 주) 개혁 자체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의 모든 기관에 새로운 사회 규범을 정착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저자는 그람시를 인용해 사람들(특히 지식인들)에게 '상식', 곧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에서 '행동인'의 관점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교육에서의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프레이리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더욱 높아진다.

"문제를 제기하는 교육이야말로 혁명의 미래다"라는 프레이리의 말을 떠올려보라. ··· 교사와 지식인은 교육의 통제권을 주체인 자신한테서 하위 주체인 학생 쪽으로 결연히 옮기는 페다고지를 진행하면서 비로소 해방의 도구가 된다. 의존하는 현재와 독립적 미래 사이의 매개체는 대화식(diaolgic) 교육이다. (253쪽)

저자는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실천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화를 통해 억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이 근본적인 인간 해방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고 규정한다.

학교는 완고한 곳이다.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학교만큼 효율적인 곳도 없다. 하지만 교육은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연하게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확고한 교육 실천을 통해, 그람시 식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 프레이리가 강조했던 것처럼, 모든 억압 받는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일도 가능하다.

이는 학생을 교육 소비자나 서비스 대상자쯤으로 여기면서 경제적 거래 관계 차원에서 대하는 현재의 학교 교육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 부제에서처럼, 죽은 학교를 살리고 삶의 교육을 일구는 진정한 교육 혁명이 필요하다. 비판적인 지식인, 미래에 대한 총체적 전망을 그릴 줄 아는 민중들의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좋은 길라잡이가 돼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스탠리 아로노위츠 지음, 오수원 옮김/이매진/2014. 1. 17./238쪽/1만3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 죽은 학교 살리고 삶의 교육 일구는 교육 혁명을 향해

스탠리 아로노위츠 지음, 오수원 옮김,
이매진, 2014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스탠리 아로노위츠 #오수원 #이매진 #파울루 프레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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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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