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밑바닥에서' 루까 役 윤경호(오른쪽)
노오란 기자
러시아 사람 푸슈킨은 말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또 다른 러시아 사람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밑바닥은 영원한 밑바닥이야.'
죽지 못해 산다는 것만큼 권태롭고 우울한 말이 또 있을까. 이 '지질한 말 한마디'는 인류의 기원에서 종말까지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불가사의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연극 '밑바닥에서'는 죽지 못해 사는 남루한 인간들의 입을 빌려 토악질을 쏟아내는 고전(苦戰)에 관한 고전(古典)이다.
들쥐 소굴 같은 지하의 여관방, 밑바닥 인생을 사는 자들이 우글댄다. 이들은 기침과 가난, 술과 도박에 취해 하루하루를 소모한다. 내일도, 희망도 없는 지하실에 '루까'라는 노인이 찾아든다. 그는 절망에 중독된 사람들의 손과 마음을 어루만지며 희망을 전파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루까'는 돌연 떠나버리고, 그와 함께 희망의 빛도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은 다시 절망을 찾아 밑바닥으로 유유히 가라앉는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듯 인간이 쓰러지는 데도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날 때부터 '도둑놈의 씨'라는 저주에 걸려 빵을 훔치고,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살인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속죄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밑바닥으로 내던져져 장렬하지 못한 최후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무뎌져 간다.
솟아날 구멍 없는 밑바닥을 가만히 응시하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죽을죄를 지었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삶'은 교묘히 제 빛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희망 또는 절망으로 변장해 사람들을 희롱한다. 하지만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간신히 밑바닥에 붙어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있다.
'루까'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값비싼 희망을 종용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더 나은 것'에 대한 욕망을 부화시키는 열(熱)과 같다. '배우'는 그 온도에 가장 먼저, 열렬히 반응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의 갈채를 받던 자신의 명대사를 기억해내고, 알코올중독을 청산하고자 '루까'가 추천한 병원으로 떠나려 한다. 여관 주인 내외의 폭력이 극에 달하는 순간 '루까'는 떠나버리고, '배우' 역시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밑바닥을 벗어나지만 결국 목을 맨다. 온도가 높을수록 알이 일찍 깨어나는 것은 아니며, 깨지기만 할 뿐이다. 열은 좀 더 오래 머물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