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4일 제주시청 앞에서 있었던 국민총파업 지지공연에 저지리 마을사람들과 결성한 밴드 '문제'로 참여해 노래했다.
조남희
그들은 내가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것까지 찍어가더니(매일 하는 설거지가 그렇게 안 돼 보이게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대체 설거지가 그렇게 우울한 일이란 말인가!) 내가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하고, 도시락을 싸서 차를 끌고 출근하는 모습을 구태여 찍어야겠다며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찾아왔다.
세차게 눈발 날리는 출근길에 동행한 그들은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그림까지 찍어야겠다길래,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회사에 민폐일 수도 있으니 어렵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급하게 찍고서야 만족한 듯 돌아갔다.
이웃들과 저녁을 먹으며 방송을 봤다. 그리고 방송을 보고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분노의 소주잔을 들이켰다. 인터뷰한 다른 이들과 나는 생각 없이 제주도로 무작정 내려가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는 실패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 방송 출연자 중 식당을 운영해서 대박이 난 이주민은 출연자에서 제외되었고, 제주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간 경우로 그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내가 한 얘기 중 긍정적이고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전부 편집되었고, 부정적인 부분만이 확대되어 짜맞춰져 있었다.
우리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힘겹고 가난해 보이도록 포장되어 있었으며 사실이 아닌 부분들도 기자는 멘트로 떠들고 있었다. 지인인 다른 출연자는 서울에서 방송을 본 선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전화했다고 했다.
"너 괜찮냐?...""나 잘 살아요, 형!"살면서 그런 전화는 처음 받아보았다며 분개했다. '서울에서 고연봉의 직장생활을 접고 제주도로 내려갔지만,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조남희씨'(방송 속 멘트), 다음날 밀려오는 분노에 참지 못하고 방송국에 전화했다.
"부장님, 어떻게 그렇게 편집을 할 수 있습니까? 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습니까?""아니 왜 그러는 건데요. 내가 조남희씨가 말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그렇게 방송을 만들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 어쨌든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게 됐습니다."결국, 전화상으로 사과를 받긴 했지만, 전국 방송의 후유증은 있었고 나의 분노는 며칠 동안 사그러지지 않았다. 그 방송국은 나의 적이라며, 너희는 왜 그러느냐며 괜히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성질을 부렸다.
"내가 그러니까 하지 말랬지. 근데 그 부장이 뭐랬다고? 우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그랬다고?... 방송이란 게, 서로 생각이 달라서, 그렇게 되기 쉬운거야..." 조그마한 땅을 샀고 건물을 올려 게스트하우스를 하려는 꿈을 꾸지만, 자금이 부족해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이, 서울에서보다 제주에서 예술적 영감을 더 얻을 수 있다고 믿어 남편과 함께 내려왔고 마을에 자리잡아 천천히 그 구상을 펼쳐나가고 있는 이(우리집 쉐어하우스 여자1호 예술가, 유라다), 그리고 나.
왜 우리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사는 이주민들로 그려졌을까. 우리가 육지에서 내려온 지 일 년 만에 어떻게 살고 있어야, 그들 눈에 성공적 정착을 한 이주민들이 되는 걸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관리인 두고 펜션 운영하면서 낚시나 다니고 있든지, 억대 연봉을 실현한, 도시 출신의 '간지'마저 넘치는 귀농계의 행운아가 되어있든지, 밀려드는 손님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박 난 식당을 운영하는 정도는 되어야 했던 걸까.
아빠의 방송 트라우마를 내가 도리어 심화시킨 게 아닐까 제주도에 내려와서 산다면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방송은 내게 후속 취재 1년 만에 인생의 결론을 바란 것 같지만, 나는 아직 삶을 살아가는 중이고 그들의 기준에 끼워 맞추는 삶을 살 생각도 없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결론을 요구할 자격이 그들에게 있는 것도, 그런 권리를 그들에게 준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안 하시는데 말이다.
아빠의 방송 트라우마를 내가 도리어 심화 시킨 게 아닐까 싶지만, 방송 후 다음날 아빠에게서 이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우리 딸, 방송 잘 봤다. 네 뒤에는 항상 엄마·아빠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분노는 다행히 그렇게 애틋하게 승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