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본 여의도광장(당시 이름은 5.16광장)은 엄청났다. 세계 어느 광장에도 뒤지지 않는 크기를 자랑했다. 사진은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1980) 중에서
영화갑자기불꽃처럼
우리나라 최초 민간인 조종사인 안창남이 기념비행을 한 곳이 바로 여의도공항이었다. 비행구경을 위해 여의도에 5만 명이 모였고, 지방에서 보러 오는 사람을 위해 남대문역에서 임시열차를 운행할 정도로 안창남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애초부터 여의도는 높고 화려하게 비상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큰 광장이 만들어진 데는 당시 최고권력자인 박정희의 의지가 컸다. 그렇게 큰 규모가 된 것이나 완공 당시 공원 이름엔 모두 박정희의 뜻이 반영됐다. 1971년 완공 당시 이름은 5·16광장이었다. 그 전까지 민족의광장, 통일의광장, 서울대광장, 여의도대광장 등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5·16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난 이름이었다.
돌이켜보면 1970, 80년대 국민들은 크고 잘 사는 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고, 그만큼 크고 넓은 건축물에 대해선 더 환호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대국 반열에 올랐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도는 열등감을 보상해 주고 우월감을 주는 실험장이었다. '최고' '최대'라는 건축물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여의도광장과 63빌딩, '최대' '최고'가 있었던 곳 여의도1975년 여의도에 들어선 국회의사당은 단일 의사당 건물로 동양 최대였다. 국회의사당 완공 10년 뒤 이번엔 63빌딩이 만들어졌다. 1985년 완공될 당시 일본 도쿄 선샤인 60빌딩을 제치고 북아메리카를 빼면 가장 높은 건물이 됐다. TV를 통해 이 압도적인 건물을 본 사람들은 이런 걱정들을 쏟아냈다.
"넘어지지 않을까?" "비행기가 날다가 부딪치지 않을까?" "불이 나면 어떻게 대피하지?"63빌딩엔 당시 일반영화관 스크린 10배 크기인 아이맥스 영화관이 들어섰다. 보통건물 8층 높이였다. 영화관에서 영화 <그랜드캐년>을 본 기억이 난다. 영화 개봉 시기를 살펴보니 1987년이었다.
1983년엔 여의도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국내 최대 백화점이었다. 그 즈음해서 여의도에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맨해튼은 뉴욕시에 속한 지역으로 고층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다. 1983년엔 여의도 반도호텔이 맨하탄호텔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의도에 증권 금융가가 생기면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라는 별명도 생겼다. 월스트리트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세계적인 증권 금융가다.
여의도와 맨해튼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지역 특징, 높은 인구밀도, 고층건물이 많다는 특성까지. 따지고 보면 그런 곳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라는 미국, 그 중에서도 경제수도라 불리는 뉴욕, 그 중 핵심구역이 맨해튼이 아니던가. 비록 맨해튼이 되진 못하더라도 그 이미지는 빌려오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2백여 채의 빌딩이 들어선 수중도시 汝矣島(여의도)는 최근 들어 50여 채의 고층빌딩이 신축붐을 이뤄 이제 서울의 맨해턴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경향신문(1984년 5월 21일)권력자들은 건축물을 통해 자기 뜻과 의지를 드러내지만 그래서 건축물은 권력자와 종종 운명을 같이 하곤 한다. 5·16광장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난을 받는다.
"군부정치의 유물인 5·16쿠데타는 온 국민이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데도 아직도 아무 거리낌 없이 5·16광장이라고 표현"(경향신문, 1993년 3월 6일) "민주당 이기택 대표는... 이번 국회대표연설에서 과거 5·16광장으로 불렸던 여의도광장을 '4·19광장'으로 개칭할 것을 제안할 방침"(동아일보, 1993년 4월 29일)1995년 조순 전 부총리가 서울시장에 뽑히면서 여의도광장은 역사 뒤로 사라진다.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녹지공원으로 바꾸는 계획이 세워졌다. 2002년까지 우리나라 최고층이던 63빌딩 또한 이후 강남 도곡동과 부산 해운대, 인천 송도 등에 잇따라 대형건물이 세워지면서 1위 자리를 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