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한 두김씨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연합뉴스
지금도 민주개혁진영 인사들이 떠올리기 싫어하는 옛일이 하나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때 '비지(비판적지지)파'니 '후단협'으로 분열된 채 우우 몰려다니던 '쪽 팔리는' 기억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므로 이제는 어느 정도 무덤덤해지기도 했으련만 많은 이들에겐 여전히 어제 일 같은 트라우마로 살아 있는 듯하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이들은 "김대중은 비토그룹이 있기 때문에 양보해야 한다"고, 김대중 지지세력은 "김영삼은 무능해서 비서정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상대를 끌어 내리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그해 10월 2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직선제를 규정한 신헌법이 93.1%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28일 김영삼이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30일 김대중은 대통령선거 출마와 함께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11월 9일 민주당은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김대중은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YS·DJ 따라 갈라진 민주 진영당시 선거법은 여론조사를 공표할 수 없게 했으나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끼리끼리 여론조사'가 대유행했고 그 결과들이 '카더라통신'을 통해 퍼지곤 했다. 대학가에서는 김대중이 부동의 1위로 꼽혔는데 내가 다니던 직장 부서(<경향신문> 체육부)에서 점심 먹으며 해 본 간이 여론조사 결과는 김영삼 4표, 김대중 3표, 노태우 2표였다. 양김씨로 갈린 표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 신문사 기자들 투표에서 노태우가 2표씩이나 얻을 수 있느냐고 분개하던 기억이 새롭다.
결국 노태우는 36.6%의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김영삼은 28.0%, 김대중은 27.1% 였다. 민주개혁진영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야권 후보가 단일화만 됐다면 김영삼이든, 김대중이든 틀림없이 대통령에 당선했을 것이라며 땅을 쳤다. 관권 부정선거가 아니었다면, 설사 단일화가 되지 않았어도 둘 중 누군가가 당선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어마어마한 관권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현직 대통령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수시로 선거대책회의를 열고 총력 관권동원을 지시했다. 재벌에게 걷어 모은 막대한 선거자금을 노태우에게 건넸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보안사 요원들이 후보들의 유세장에 출몰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군에서는 대놓고 색깔론을 들먹이며 김대중을 위협했다. KAL 858기를 폭파한 혐의를 받고 있던 김현희는 투표 이틀 전에 국내로 압송되어 민심을 뒤집어 놓았다. 투표 당일 구로구을 투표구에서는 실제로 부정선거 의혹을 둘러싼 대규모 점거 시위사태가 벌어졌다.
선거 직후 김영삼은 선거 자체를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내가 지금까지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고 말 것"이라며 "선거 혁명을 통한 정권교체가 나의 지론이었고 내가 선거유세를 통해 이 정권이 독재정권의 연장을 꾀할 때 제2의 이승만, 제2의 마르코스가 될 것이라고 계속 충고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내 목숨이 두렵지 않다"고 투쟁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김영삼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관권 부정선거는 전혀 이슈가 되지 못했다. 노태우 당선의 '1등 공신'은 부정선거가 아니라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이라는 확신이 국민들의 뇌리에 확고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분열이라는 '원죄'가 너무 컸다. 수구화된 언론이 그걸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