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어렵고 힘든 고전 읽기
The Johnnie Chair
'리어왕' '오만과 편견'... 이게 고전의 전부가 아니다 고전을 읽는다고 했을 때 '<리어왕>, <오만과 편견> 같은 책들? 재밌겠다~' 하고 생각하던 내 뒤통수를 세인트 존스는 따악- 때렸다. "그게 고전의 전부인 줄 알았지? 히히히!" 하고 말하며. 내가 생각했던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등의 책들도 다 고전이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고전들은 그 영역이 아주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즉,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의 책들은 (굳이 따지자면) '문학 고전'에 속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등은 '철학 고전'에 속할 테고, 뉴턴, 아인슈타인, 코페르니쿠스의 책 들은 '수학&과학 고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사실 이렇게 고전의 종류를 정확히 구분지을 수는 없다. 수학, 과학, 철학은 다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을 하기 쉽도록 일단 나눠 본 것이다).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익숙했던 문학 고전들을 많이 생각하며 학교에 왔는데 세인트 존스는 문학 고전을 읽는 비중은 적은 편이었고, 그에 따라 나는 예상도, 기대도 않았던 철학, 과학, 수학 고전들에 둘러싸이게 된 것이다.
세인트 존스에서의 4년간의 수업이 다 이미 정해져 있고, 따라서 학생에게 수업을 선택할 권한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인트 존스에 온다는 것은 수학, 과학, 음악, 언어, 철학 분야의 고전 수업들을 4년간 듣겠다고 매 학기마다 해야 하는 수강신청을 이미 한방에 하고 온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디테일한 설명으로 들어가보자. 세인트 존스에서의 4년간의 고전 수업은 어떻게 짜여 있는 것일까?
우선 4년간 고전 100권을 읽는 수업에 대해서 먼저 말해야겠다. 4년간 고전 100권을 읽는 공부는 세인트 존스 공부의 핵심, '세미나'에서 할 수 있다. 하지만 세미나는 '수업'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 그냥 저녁 식사 후 있는 독서 동아리의 모임(?) 같은 느낌이다. 세인트 존스 산타페 교정에서는 매주 월, 목요일 저녁 7시 15분이 되면 세미나 15분 전을 알리는 학교 종탑이 뎅-뎅 울리기 시작하고 학생 대이동(?)이 벌어진다.
모든 학생, 튜터들이 기숙사, 도서관, 그 외 학교 건물들에서 기어나와(?) 자기 세미나 교실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 두 시간 동안은 세인트 존스라는 작은 커뮤니티의 거의 모든 일원이 각자의 교실들에 모여 앉아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 시간에 만약 방문객이 학교에 와 본다면 건물 어디를 가든 1층, 2층 모든 교실들이 학생, 튜터들로 꽉 찬 채 열정적인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사실 지금부터는 세미나를 포함해 전반적인 세인트 존스 고전 공부 커리큘럼에 관해 조금 더 디테일한 설명을 할 생각이다. 글이 지루해질 거라 슬프지만 혹시 세인트 존스에 관심있거나 고전 공부에 관심 있는 분들이 궁금해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설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세인트 존스 커리큘럼을 파헤쳐보자 그럼 세미나에서는 4년간 어떤 고전들을 읽나? 4년간의 세미나 리딩 리스트는 시대순으로 짜여져 있다.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면 1학년은 '그리스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사상의 기반이 된 호머, 소포클레스 등의 그리스 희비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등을 읽는다. 2학년 때는 성서를 시작으로 고전 로마 시, 문학 작품들, 버질, 아콰이나스, 단테, 셰익스피어 등을 공부한다. 2학년이 시대순으로 볼 때 아주 광범위한 시대의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해다.
3학년은 17, 18세기 작품들로 한정이 된다. 윤리, 정치적 탐구, 사상들이 형이상학과 뒤섞이면서 루소, 스피노자, 칸트 등의 책을 읽게 되고 처음으로 미국 작가들(해밀턴, 마크 트웨인 등)의 작품도 공부한다. 마지막 4학년은 드디어 현대로 넘어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쟁과 평화> 등의 대하소설뿐만 아니라 링컨 연설문,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 게다가 헤겔, 하이데거, 니체 등 가장 어렵기로 유명한 작가들의 책을 같이 공부한다.
이게 바로 세인트 존스의 '4년간 고전 100권을 읽는다'는 세미나다. 개인적으로는 1, 2학년때까지는 책들이 재미있었다. 문학 고전에 속하는 책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 4학년에 가면서 난이도가 확 높아졌고 많이 어려워졌다. 하여튼 세미나는 대충 정리해 보자면 문학, 철학, 윤리, 정치 고전들을 많이 읽는다.
그렇다면 이제 저녁에 하는 '세미나' 말고, 그 외 낮 시간에 있는, 보통 대학 수업 같은 그런 수업들에 대해 살펴보자. 낮 시간에 있는 수업들을 우리는 튜토리알(Tutorial)이라고 부른다. 세인트 존스의 튜토리알은 네 종류가 있다. 수학, 과학(랩), 음악, 언어(랭기지). 세미나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시대순으로 고전의 흐름을 따라가며 만들어진 것처럼, 얘네들 역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흐름이 있다. 자세히 설명하면 좋겠지만 지루한 관계로 간단히 설명하겠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극이겠지만, 세인트 존스에서 수학 수업은 4년 내내 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수학과는 천적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아무리 다른 과목들이 더 낮은 점수가 나오려고 발버둥 쳐도 수학은 여유로운 썩소를 지으며 '절대 부동 최하 점수' 자리를 다른 과목들에게 넘겨 준 적이 없었다(그러고 보니 이것들이 왜 그렇게 낮은 자리만 좋아했나 몰라~).
그랬기 때문에 세인트 존스에 가면 수학을 4년 내내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정녕 대학에서까지도 수학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면서 울부짖었다. 하지만 세인트 존스의 수학은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수학이란 녀석의 이미지를 180도 바꿔놓게 되었다. 정말로 너무 너무 재미있는, 내가 세인트 존스 수업들 중 제일 좋아하는 수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은 1학년 때 고대 그리스 수학인 유클리드 기하학을 시작으로 천문학, 현대 수학으로 가는 과정들을 배우다가 미적분, 수학 이론을 배우고 비(非)유클리드 기하학, 상대성 이론, 현대 수학의 주요 토픽들을 살펴보며 4학년을 마친다. 이렇게 써 놓으니 뭔가 되게 어려워 보이는데 정말 그렇지 않다. 기하학에선 도형을 가지고 놀면서 법칙을 찾아내다가 그 도형들이 우주가 작용하는 원리인 걸 알게 되며 "유레카!"를 외치고, 시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0은 무엇인가?' '숫자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등 수학은 의외로 너무나 신나는 과목이었다.
반면에 (2학년을 뺀 1, 3, 4학년) 3년간 수업을 들어야 하는 과학(랩)은 나에게 제일 어려운 과목이었다. 1학년 때는 생물학, 화학을 잠깐 맛보고, 3학년 때는 물리학, 4학년 때는 다시 생물학으로 돌아와 세포질과 분자 생물학, 유전학을 하고 물리학도 다시 하면서 양자역학, 원자론 등을 배운다(되게 어렵게 들리는군!).
그랬다. 사실 정말 어려웠다. 별로 남을 탓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이 과목만큼은 어려운 걸 내 탓이 아닌 과학자들 탓을 좀 해야겠다. 수학은 수업시간에 나오는 질문들이나 배우는 것들이 그나마 더 광범위한 느낌이었다면 과학은 좀 더 전문적이고 하나의 주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원전의 일부분만을 읽으며 공부하기가 참 힘들었다. 근데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수학은 좋아하고 랩은 싫어했지만 나랑은 반대로 수학을 싫어하고 랩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고, 둘 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 수학, 과학 수업들 역시 교과서, 전공서적이 아닌 원전을 읽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원전을 전부 다 읽는 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에 맞춰 작가들의 고전 중 필요한 '일부분'만을 읽는다. 그 일부분만을 따내서 새로 편집되고 출판된 것이 세인트 존스의 매뉴얼(Manual)이다.
즉 완전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핸드폰 만드는 것을 알고 싶은데 핸드폰 만드는 법에 대해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삼성, 모토로라 이 세가지 회사에서 쓴 '핸드폰 만드는 법' 책이 있다면 이 책을 다 읽는 게 아니라 애플의 책에 있는 서론, 삼성의 본론, 모토로라의 결론을 따와서 만들어진, 원전 짜깁기(?), 세인트 존스 매뉴얼(Manual)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수학, 과학 수업들에서도 아인슈타인, 뉴턴, 패러데이, 맥스웰 같은 중요 인물 몇몇의 중요한 책들은 그 책 자체를 읽기도 하는 등 튜토리얼 수업은 메뉴얼과 원전을 번갈아 가며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다음으로 남은 수업은 랭기지와 음악이다. 랭기지 역시 4년 내내 수업을 들어야 한다. 1, 2학때는 고대 그리스어인 희랍어, 논리, 영시를 배운다. 희랍어를 배우면서는 오이디푸스 왕 같은 고대 그리스 희비극을 번역하기도 하고, 희랍어 성서를 번역하기도 한다. 또 중세 영어로 넘어와서 캔터베리 이야기, 셰익스피어도 공부한다.
3, 4학년엔 불어를 배우고 파스칼 팡세나 라신의 페드라 같은 작품을 번역한다. 또 에밀리 디킨슨 등 현대 미국 시와 소설, 수필 등도 공부한다. 이 랭기지 수업이야말로 원전으로 공부하지 않는 수업이라고 할 순 없구나. 희랍어, 불어 문법 같은 건 고전 같은게 없으니 문법 책을 하나 정해 공부를 하지만 희랍어 성서나 오이디푸스 왕 같은 걸 번역 할 때는 원전을 번역한다. 직접 번역을 해보며 원전과 번역판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 차이점들에 대해 토론을 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은 1, 2학년, 2년간 수업을 듣는다. 바흐, 베토벤, 모짜르트, 스트라빈스키등의 음악을 수업시간에 함께 들으며 전반적인 분석을 하고 세인트 존스 메뉴얼을 가지고 이론 체계, 멜로디, 대위법, 하모니, 리듬 등등을 공부하고 토론 한다. 나는 모짜르트의 돈 지오반니, 바흐의 성 마태오 수난곡을 두꺼운 악보집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