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크랩>
비채, 2014
이 책에 실린 하루키의 글들은 모두 <스포츠 그래픽 넘버>라는 잡지에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연재한 일종의 칼럼입니다. 국내에는 2004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윤성원 역으로 나온 바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권남희 역으로 새롭게 출간되었군요.
모양도 독특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넘버>의 연재기획 자체가 참 독특합니다. 가타부타 긴 말 필요없이 서문에 나오는 하루키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뉴요커><라이프><피플><뉴욕><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긴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 p.004.잡지의 편집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기획을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막상 그 원고를 쓰는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일면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이 연재를 마친 뒤에 발표한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 신드롬을 낳았습니다. 편집자는 이미 하루키의 가능성을 꿰뚫어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넘버>에 실린 글들의 날짜가 매월 5일과, 20일로 적어져 있는 것을 보면 대략 2주 마다 출간되는 잡지였나본데, 뒹굴거리면서 왕창 배달된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기사 몇 편을 스크랩하고, 그걸 토대로 글을 뚝딱 써서 잡지사에 보내는 것 만으로 "끝!" 나다니…정말 부러운 직업이 아닐 수 없네요.
하지만 하루키 스스로 "거저먹기였다"라고 표현했지만 글들도 거저 쓰여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흥미진진한 글들을 용케 고르고 고른 다음 하루키 특유의 위트가 가득한 코멘트를 달아 만든 하루키 만의 명품 에세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보면 하루키는 이 책을 이렇게 봐달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크랩북은 문자 그대로 잡탕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든가 "오오, 이런 일이"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겨주신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이다. - p.006사실 저는 하루키가 스크랩을 열심히 했던 그 기간에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는 공감은 할 수 없었지만, "오오, 이런 일이" 라고 느낄 스크랩들은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잡지에 실린 글들을 일본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다보니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하루키의 시선으로 해석한 부분에 주로 공감이 많이갔습니다. 특히 <오디오의 지옥성에 관해> 라는 칼럼에서 오디오의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부품을 교체하면서 가족에게 들키지 않거나, 들켜도 얼버무리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키의 이야기가 주위에서 DSLR에 푹 빠져서 수백만 원짜리 렌즈를 새로 샀다가 혼나는 요즈음 사람들의 이야기에 오버랩되면서 1980년대의 삶도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이나 큰 변화는 없었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이 가고 다음 페이지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해지는 이 독특한 스크랩북을 읽다보니 기록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루키 만큼의 글을 쓸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저도 오늘 그의 스크랩북을 스크랩합니다.
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비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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