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왕푸징에 있는 라오서 기념관홍위병들에게 모욕을 당한 작가는 태평호에 몸을 던져 시대를 마감했다. 하지만 문혁의 신호탄에 지나지 않았다
조창완
이 여파로 인해 8월24일에는 중국의 저명한 작가 라오셔(老舍)가 베이징 동북부에 있는 타이핑후(太平湖)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낙타상자> 등 저명한 작가였지만 홍위병들의 조리돌림에 수치심을 느끼고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인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1976년은 더욱 그랬다. 새해가 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은 1월 8일.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던 정치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영면했다. 저우 총리의 추도식인 4월5일에는 덩샤오핑 복권을 요구하는 45운동이 일어났다. 7월1일에는 루산회의의 희생자 장원톈(張聞天)이 사망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인 7월6일 중국 군인의 상징적인 인물인 주더(朱德)가 사망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7월28일 허베이성 탕산을 진원으로한 7.8 진도의 강진이 발생해 공식발표로만 24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9월 9일 지금은 신이 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후에 중국 군부 원로인 예젠잉이 화궈펑(華國鋒), 왕동씽(汪東興) 등과 힘을 합쳐 4인방을 체포하면서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30년 여가 지난 2006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올림픽이나 엑스포 등을 앞둔 자신만만한 시기였다. 1월이 시작되자 마자 전해의 경제성장률이 9.8%에 이른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는 예상치인 9.4%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로 거대한 중국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뿐 아니라 그해 2월28일 외환보유고가 8537억 달러를 기록해 일본을 제치고 외환보유고 1위 국가로 등극했다.
중국 경제 성장의 낙수효과를 확실히 본 곳은 한국이었다. 전해 한중 간의 교역규모도 1006억 달러였는데 한국의 무역흑자가 200억 달러로 중국 성장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해 설날에는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타이베이 간 특별기가 운항해 주목을 끌었다. 춘지에를 앞둔 1월25일 베이징 쇼우두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열린 대만행 귀성 전세기를 취재했다. 정기항편은 이보다 3년여가 지난 2008년 12월에야 개설됐지만 2006년 춘지에 귀성편이 그 첫걸음이 됐다.
그해에도 봄이 되자 나는 황사 근원지를 찾아갔다. 특히 그해 겨울 황사근원지의 강수량도 작고, 기온이 높아 황사 발생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긴장된 마음으로 꼼꼼히 점검했다. 3월 14일에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황사, 3년간의 침묵깨고 다시 분다'는 기사를 올렸다. 그해 지독한 황사들이 4월말까지 한국을 유린했다. 황사가 심해야 주목받을 수 밖에 없는 황사 전문 탐사꾼의 생활도 그해를 기점으로 지루해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