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미의 <시인의 교실>(교육공동체 벗) 표지
안준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몇 줄을 더 읽어가다가 이내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이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이 내게도 자못 심각한 사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악법이 문제라면 그 법을 따르지 않고 도망도 치고 싸움도 해야 하지만, 무고한 사람이 자기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있다면 그건 밝혀야하지 않니?""진실을 밝히는 것은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사람이 없을 걸요. 선생님이라면 그러실 수 있겠어요? 만약에 사형을 당한다면요?""흠, 그럼 내가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죄 없는 사람이 나 때문에 사형을 당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이런 상황이야. 내가 죽을 것인가. 다른 사람을 죽일 것인가?""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어쨌든 자기가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요."결국, 문학수업을 통해 장발장의 숭고한 정신을 가르치고자 했던 조향미는 대다수 아이들에게 동의는커녕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매도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래, 이렇게 말을 하는 나도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나 살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할지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이렇게 숭고한 정신이 드러난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감동받으며 그것을 본받으려는 마음이 일어나기는 해야할 것이다. 나약하고 이기적인 나를 반성하고 나도 이렇게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종교며 학문이며 예술은 다 뭐란 말인가."내가 처음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이런 현실의 묵직함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의 발랄한 수업이 가능했던 지점에서였다. 그렇다고 그런 찬란한 순간마저도 현실이 녹록했던 건 아니다. 가령, 저자와 아이들이 육사의 <광야>를 공부하는 장면은 지금도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눈이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바로 이 대목에서 한 아이가 이렇게 외친다.
"저는 안 뿌릴 거예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열 개 반의 <광야> 마무리 수업을 새로 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뒤에도 <광야>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수업이 된 것도 이 대답 때문이었다. 그날 그 아이와의 대화가 이렇게 이어진 뒤의 일이다.
"씨앗을 안 뿌리겠다는 말은 용기가 없어서 못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이네?""내가 열매를 따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뿌려요?""흠... 그래? 그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열매들은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아이는 순간 멈칫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가르치는 시인의 교실의 풍경은 아름답다. 물론 이때의 아름다움은 문학교사 조향미가 창조해낸 것이다. 열악한 텃밭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듯이 말이다. 아이들과 주고받는 대화도 무척 살갑다. 이때의 살가움도 시인이자 교사인 조향미의 작품이지만 그 원형은 아이들로부터 나온 것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공부=성적=입시'라는 등식만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학교에서 문학 수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삶은 원형을 잃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교사 조향미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왕자와 희망버스'라는 제목을 단 저자의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퍽 신선하게 읽힌다. 이 꼭지 글은 어느해 모 대학교 정시 논술문제를 학생들과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논제 파악부터 쉽지가 않을 것 같은 난해한 문제를 저자는 비교적 손쉽게 풀어나간다. 논술은 결국 삶에서 나온다. 삶(시대)에 대한 해석이 탁월해야 좋은 글도 써진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많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교실의 아이들은 차츰 시인을 닮아가면서 자기 성장의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지금 슬프다. 무엇보다도 가르친다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다고 고백한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학교는 사회(시대)의 반영인 것을. 학교에서 소사(小事)를 하고 계시는 소사(지금은 주사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가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교사나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유럽 등 다른 몇 선진국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데,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는 한낱 유토피아에 불과한 그런 세상이 이미 와 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것일까?
저자는 그런 삶(시대)에 대한 생각을 엄살도 과장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얀 종이에 꾹꾹 눌러 쓴 글씨처럼 아프게 드러낸다. 이런 사유나 글쓰기 행위가 저자에게는 일종의 '수용'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래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라는데, 나만 안 슬프고 안 아프며 살 수 있나"라는 고백이 말의 허영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문학교사로만 한정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서두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교사이자 시인인 저자가 지극한 '우주적 모성'으로 쓴 산문들을 읽다보면 피가 맑아지면서 없었던 영혼이 생겨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아, 나도 여생이나마 진실한 삶을 궁구하며 살고 싶어진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