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폭과 그 후의 삶을 증언하는 박영표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제일 먼저 증언에 나선 박영표(78)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히로시마로 갔다. 아버지는 농토를 빼앗기고 생계가 막막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로 일을 찾아 떠난 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원자폭탄 피폭자가 된 그는 원자폭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원폭으로 인해 집이 무너지고 자신도 크게 다쳐 가슴에 피가 철철 흘렀다.
어머니와 형들과 함께 방공호로 피신해 응급처치를 받고 이틀 동안을 방공호에서 지냈다. 귀국길에 오른 것은 그 해 12월 중순이었다. 시모노세키 항구는 귀국 인파로 인산인해였고 서로 먼저 연락선을 타려고 아비규환이었다. 귀국 후 아버지의 몸 전체에서 피부병이 생기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56세의 나이로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형제자매들도 방사능 후유증으로 위암, 갑상선암, 전립선암 등의 수술을 하며 평생 고생했다.
박영표 회장은 "70년간 정부는 실태조사 한 번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배상 대상에서 원폭피해자는 빠져있었다면서도 일본정부에 대한 피해배상 협상은 하지 않고 있다. 원폭피해자들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간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긴 세월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원폭피해자운동을 펼쳐온 심진태(72) 합천지부장은 "때리는 서방님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속담처럼, 우리 정부는 69년이 흐르는 동안 자국민 원폭피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 한 번 하지 않았다. 원폭을 투하한 미국도, 전범국 일본도 서로 피해자라 하니 가해자는 어디에도 없는 형국이다. 우리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일본 등에 한국피폭자를 대변하여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지 정말 분통이 터진다"며 당당하고 결연한 음성으로 정부를 꾸짖었다.
이어 그는 "우리 피폭자는 거지가 아니다. 1965년 한일수교 후 대일청구권자금을 일본에서 수령하여 한국의 경제발전에 썼다고 하는데 정부는 피폭자들에게 기민정책을 펼쳤다. 우리 경제도 세계 10위권에 이르렀다는데 경제부국이라도 소외된 국민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후진국"이라면서, "구술 증언이라도 할 수 있는 피폭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있을 때 하루 속히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증언자, 피해자 살아있을 때 대책 마련해야"한편 원폭피해자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통한과 분노가 어린 슬픔도 있었다. 김봉대(77)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의 아내 이곡지(75)씨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원폭 피폭자가 되었다. 세 자매 중 큰 언니와 아버지가 원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피폭자인 모친도 해방 후 고향 합천으로 돌아와 살다가 병으로 고생하셨다. 이곡지씨 본인도 피부병, 등허리 종양, 골다공증 등 숱한 병마와 싸워야 했다.
결혼 후 부산에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한 명은 생후 22개월 만에 폐렴으로 죽었고, 다른 쌍둥이 아들인 김형률씨는 30년간 병치레를 하며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다 지난 2005년 5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봉대씨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2명밖에 없다는 희귀난치병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었다.
원폭2세 피해자였던 고 김형률씨는 서른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3년 동안,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병마로 고통받고 있다면서 국가의 진상규명과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원폭2세환우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계속해서 고 김형률씨는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설립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건강실태조사를 이끌어내는가 하면,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환우 진상규명과 지원 특별법(일명 '김형률법')을 국회에 청원했다. 또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며 법안 설명회, 입법토론회, 증언대회를 펼치고 직접 정책제안서를 작성하여 정부와 수많은 기관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 2005년에는 국내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이후 계류되다 자동폐기됨)되었고, 원폭2세환우의 현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수명이 줄어들고 죽음이 가까워 오는 순간에도 다른 원폭2세 환우들의 삶을 계속되게 하는 이 처절하고 숭고한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고.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김봉대 고문은 "원폭2세환우들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폭력이며 인권침해"라면서, "형률이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나는 이 땅의 모든 원폭2세환우의 아버지다.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원폭피해자 2세환우들의 가족과도 연대하여 끝까지 싸울 것이다. 형률이의 삶은 살아있는 원폭2세환우들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절절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