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9월 열린 열린우리당 참여정치연구회 모임.
장재완
"우리의 모색은 과거의 낡은 관행과의 결별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2003년 11월 11일) 7개월 여 만인 2004년 6월, 혁신 모임이 발족했다. 당 내 운동권 출신 30~40대 의원 34명으로 이뤄진 '국가발전을 위한 새로운 모색'(우상호·김영춘·이종걸 등)이다. 이들은 "당내 세력 경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모임의 기둥을 이룬 재야파 의원들의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정치 결사체 수준으로 진화하지 못했고 정치인의 친목모임 수준을 넘지 못했다.
2004년 '중도노선 정당으로 발전시키는데 봉사하는 정치결사'를 표방하며 참여정치연구회(이후 참여정치실천연대, 유시민·이광철·유기홍 등)가 창립했다. 당내 대표적 친노그룹으로 불린 참정연은 출범 후 기간당원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개혁 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수정 반대 등을 주장하며 정체성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당 안팎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2007년 5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언론은 "무능한 개혁세력이라는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에 못 이겨, 스스로 해체를 결의했다"고 평했다.
2005년 발족한 신진보연대(신기남·이목희·김태년 등)는 "열린우리당이 지난 1년간 정체성을 찾는데 상당히 미흡했다,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것에 도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렵다"며 전격 출범했다. 이듬해 열린우리당 소속 초선 의원 모임인 '처음처럼'(김현미·조정식·최재성 등)은 "계파 영향권을 뛰어넘는 집단적 정치 지점을 구축하기 위해 모임을 결성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출범한 '소통과 화합의 광장'(문희상·유인태·원혜영·오영식·신계륜)은 중진의원을 중심으로 한 모임으로 "선후배간 소통의 광장으로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자"며 출범했다. 모두 변화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이들 모임 뒤를 따르는 수식어는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진보연대'에는 신기남 의원의 재기 모색을 위한 세 규합이라는 평가가, '처음처럼'에는 정동영·김근태 등 특정 대선주자의 세 확대 차원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소통과 화합의 광장'의 경우, 당내 양대 계파인 김근태·정동영 측 의원들은 거의 없었고 당시 김혁규 측 의원들이 대부분 소속돼 있어 '소통과 화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부터 제기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쇄신' 바람은 531만 표 차이로 대선에서 대패한 후 거세게 불어 닥쳤다. 19명(초기엔 18명, 이후엔 15명으로 줄어듦)의 초선 의원이 주축이 된 '초선 모임(2007년 12월 25일 성명 발표)'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와 장관,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지냈던 이들의 백의종군을 촉구했다. 2선 후퇴 또는 총선 불출마를 요구한 것. 이같은 기준에 따르면, 당 안팎 유력인사가 모두 총선 불출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로 인해 유일하게 남는 인물이었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추대하기 위한 모임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살생부가 난무했을 뿐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이는 없는 채 서로를 힐난하기 바빴다. 대선 패배의 원인이 뭔지,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뼈저린 반성은 없었다. '쇄신'이 될 리 만무했다.
독자세력화 꿈꾸던 '진보행동' 마저 자진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