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딘성 고자이마을의 위령탑2월 26일, 이곳에서 베트남 인민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48주년 위령제가 열린다.
황윤희
꼭 반세기 만이다. 우리들의 평화기행은 대한민국이 1964년, 베트남에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정확히 50년 후에 이뤄졌다.
이전에 사이공으로 불리던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 공항에 발을 디딜 때, 그저 심란했다. 다가오는 역사의 무게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 세대의 치부를 보는 일은 후세대로서 외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 혹은 우리세대와 영원히 무관했으면 하는 바람은 절대적으로 그릇되며,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숨을 들이켰다. 열대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미고 있었다. 우리는 왜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해 총을 들었어야 했나, 그것은 어떻게 기억되고 반성되어야 하는가, 질문이 솟구쳤다.
13명의 평화기행단은 호치민시의 전쟁증적박물관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매, 작은 체구의 그 여성이 바로 베트남 관련 문헌을 읽을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던 구수정씨였다.
그녀는 한국이 베트남과 외교를 수립한 1992년, 그 다음 해 베트남에 건너갔다가 현지에 수많은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증오비라니! 그런 비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지구상 어딘가에 우리를 증오하고, 그 증오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이 서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가난한 가운데도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라니. 그 증오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누군가의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살 떨리는 경험이다.
아마 구수정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이후 그녀의 일생은 크게 방향을 튼다. 그때부터 베트남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한국의 베트남 파병과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 감추고 싶은 역사, 감히 드러내기 주저되는 역사를 알고, 또 알리기 위해 이 여성은 지금껏 홀로 일생을 바치고 있다.
찢어진 사지, 초토화된 땅... 그리고 독립선언문현재 '아맙'의 본부장으로 있는 구수정씨의 설명을 곁들여 전쟁증적박물관을 돌아보았다. 박물관은 한 마디로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거대한 기록물이었다. 박물관에는 전쟁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찢어진 사지가, 폭격과 고엽제로 초토화된 땅이, 또 사산한 태아의 사체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의 참상과 침략군이 저지른 온갖 만행이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뒷골이 당기고 얼굴이 뜨거웠다. 자유와 정의의 대명사인 '미국',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의 숨겨진 이면을 이토록 대놓고 드러내놓고 비판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건 어쩌면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 베트남의 힘이었다.
우리 일행이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독립선언문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사지가 찢기고 온몸이 꺾인 사진들 앞에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전시해 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베트남은 그것을 통해 이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믿는 진리이나 너희는 실제에서 그를 어떻게 실현했는가? 너희가 말하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권'이 이 베트남에는 해당하지 않았던가?' 이는 미국과 미국의 전쟁에 동참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박물관에는 신기하게도 관람을 온 백인들이 많았다. 과거 자신의 조국이 한 번쯤 제국의 역사를 가졌을 법한 그들은 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전하는 수많은 침해의 기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 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이다. 참혹한 사진들 앞에서 그들은 별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