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좁다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김포시와 떨어져 있지요.
문희일
교동도는 강화도를 거쳐서 들어가는 곳인지라 강화도와 같게 느껴지는 곳인데, 그곳은 조선시대 왕족들의 수난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선조의 첫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형님인 임해군이 교동도로 유배를 왔고,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과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도 역시 유배를 교동도로 왔다. 그 외 철종의 사촌인 익평군과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 등도 교동도로 유배를 당했다. 이들은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나거나 또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흔히 왕과 실세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산 사람들이 유배를 당하는데, 될 수 있으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어서 다른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함경도나 평안도의 오지로 보내거나 전라도의 오지나 먼 섬, 제주도가 유배지로 정해지곤 했다. 그러나 폐위가 된 왕들과 왕자들은 도성에서 가까운 강화도나 교동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들은 자칫하면 다시 역모를 꾀할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들이라 특별 관리의 필요성에 의해 가까운 거리의 섬을 유배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한양에서 가까우니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죄목이 역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도가 가시적인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멀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것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산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임해군과 능창대군 등이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모두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소용이 없었다.
강화도로 유배를 오는 그들에게는 굴욕과 죽음만이 남아 있었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는, 파리 목숨과 매한가지였을 그들에게 내일의 기약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회한과 두려움으로 도성을 떠나 강화까지 끌려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