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주소 표지판새도로명주소 표지판과 구 표지판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
2011년 7월 29일 전국 고시 이후 2년 반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4년 1월 1일 새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되었다. 하지만 '전면' 시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새 도로명 주소 사용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이미 여러 기관에서 지적한 것처럼 안내 표지판 교체, 주민들의 숙지도 부족 등 새 주소 사용을 위한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후 추가로 들어갈 예산 역시 무시할 수 없이 막대한 규모라는 것도 문제다. 정부는 현재 이 정책에 약 4천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사용했다. 이 예산의 87.4%가 새 도로명 주소 안내 표지판을 만드는데 들어갔고, 액수로는 3415억 원이다. 국토부는 전국의 16만 개 정도의 표지판 중 3만5천개 정도를 교체해야 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사용한 예산의 거의 절반 가까운 돈이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는 국민은 별로 없다.
지난 13일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는 주민 20% 이상이 신청하고 주민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도로명 주소 변경을 허용하는 방안, 공인중개사 도로명 주소 교육 강화, 택배업계 배달구역과 경로 개발 지원 등의 내용이 담긴 '도로명 주소 조기정착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들의 도로명 주소 활용도는 매우 낮다.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시작부터 뭇매를 맞는 이유다.
집배원 업무 환경 고려하지 않은 새 도로명 주소모든 국민들이 도로명 주소 변경으로 혼란을 겪고 있지만 이로 인해 더욱 큰 고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체국에서 일하는 집배원들이다. 주소 체계 변경 자체가 집배원들의 업무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먼저 가장 큰 문제는 '동(洞)'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배달구역과 새로운 도로명 주소로 나뉘는 구역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기존의 우체국은 이전 주소 체계에 따라 효과적으로 물량을 나누고 배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각 지역에 만들어졌다. 또 각 우체국 내에서도 '동(洞)'이라는 체계에 따라 각 집배원들의 배달구역을 정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도로명 주소 체계 내에서는 이 '동'이라는 구분이 무색하다. 따라서 배달구역이 애매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 아니라 잘못 분류된 편지나 택배 물건의 경우, 예전에는 담당 집배원을 바로 찾아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해당 구역이 원래 어떤 구역이었는지 일일이 검색을 거친 뒤 담당 집배원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또한 기존의 '동'이 각 지역의 문화나 역사 등을 반영한 이름이기에 그 연관성을 찾아 외우기가 쉬운 반면, 새로운 도로명 주소는 이와 상관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지난 6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지적한 대로 인천 청라국제도시의 '크리스탈로', '사파이어로', 경북 영주에서 울진까지 36번 국도가 '파인토피아'로 불리는 등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 뿐 아니라 스포츠로, 테라피로, 드림로 등 기존 지역과 전혀 연관성을 유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외래어가 아니더라도 명사로 된 수많은 도로 이름을 완전히 숙지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집배원들의 담당구역 내에는 최소 100여 개의 도로명 주소가 있고, 이런 도로명은 전국에 총 16만개 이상, 서울만 1만5천여 개가 있다. 경기도의 한 집배원은 "기존 주소는 1개 구역 당 1주일 정도면 외울 수 있었는데, 도로명 주소는 숙지가 어렵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만약 주민투표 등을 통해 각 지역의 주소 변경까지 가능해진다면, 집배원들은 바뀌는 주소를 매번 다시 외워야 하는 문제까지 발생한다. 상황이 이러한데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을 앞두고 우정사업본부는 직원들에게 '도로명주소 직원 이해 및 홍보사항 이행실태 점검표'를 발송하여 숙지도를 점검하고, 도로명 주소에 관한 시험을 치게 하는 등 집배원들의 업무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또 있다. 집배원들의 하루 배달 동선에 관한 부분이다. 예전에는 호수가 달라도 같은 번지라면 인근 지역임을 유추해 배달 동선을 간편히 짤 수 있었다. 하지만 새 도로명 주소 체계에서는 배달 목표지 근처의 배달지를 유추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전처럼 유사한 주소를 가진 주소지들이 밀집되어 블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구획된 '로'를 따라 주소지가 배열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소만으로는 쉽게 그 거리를 유추하기가 어려워진다.
하루 평균 우편물 분류 작업만 4시간, 배달은 6시간을 사용하는 집배원들의 경우, 이 때문에 신속한 업무 수행에 많은 차질이 생긴다. 특히 좁은 골목길이 많은 주택가 밀집 지역 등을 담당한 집배원의 경우 배달에 더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A 우체국의 한 집배원은 "도로명 주소만으로 집을 찾아가기 어려워 스마트폰에 일일이 새 주소를 입력하며 배달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완하기 위해 인근 도로의 경우 같은 이름을 쓰고 번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변경하는 등 보완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 서초구에서는 '도로명주소 상황대응반'까지 꾸릴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지옥이다.
여기에 '겸배'라는 집배원들의 특수한 업무 조건이 더해지면 노동 강도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겸배란 같은 팀의 집배원이 개인 사정이 있어 출근하지 못하거나 병가 등을 사용할 경우, 해당 물량을 팀 내의 다른 집배원들이 모두 나눠서 배달하는 것을 말한다. 도로명 주소 시행으로 원래 구역을 배달하는 시간도 길어지는 것에 더해, 새로운 구역까지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구역의 경우 숙지도가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고, 일일이 검색을 통해 배달지를 찾아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실제로 B 우체국의 한 집배원은 "동료가 빙판길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나 병가를 사용했다. 병가자의 물량을 채우기 위해 팀 내의 다른 집배원들이 일일이 새 도로명 주소를 찾아가며 배달을 했다"고 설명했다. 겸배가 집배원들에게 일상적인 문제인 만큼, 새 도로명 주소의 부담 역시 배로 증가한 것이다.
집배원의 장시간-중노동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