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진실을 마주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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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본문 중에서)니체는 '영원불멸한 세계관이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영원불멸한 천국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고 행복을 얻을 수 있기에 지금의 고통은 감내하라는 말에 대해 니체는 브레이크를 걸고 '영원회귀'의 세계관을 제안한다. '영원회귀'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다.
오늘 내가 진실을 마주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비겁하게 꼬리를 내렸다면, 10만 년 뒤에도 100만 년 뒤에도 똑같이 회귀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비겁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의 기쁨을 위해 오늘의 내가 비굴하고 고통을 참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내가 참으면 참을수록 그만큼의 횟수만큼 인생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중에서)어떤가? 당신은 지금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반복돼도 좋은 삶을 살고 있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솔직하지 못한 나를 애써 변명하며 살고 있진 않는가?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때다.
과연 우리는 그들만큼 솔직하고 당당한가? 어쩌면 우리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언제까지 우리는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것인가? 50세에 드디어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된 이지는 우리에게 묻는다.(본문 중에서)이는 아이의 마음을 강조한 이지의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박수를 칠 때 "임금님은 벌거벗었네"라고 말한 아이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난다. "그래,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어." 그제야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하고 사실을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는 현실에서 순수한 동심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소리를 내고 있는가? 단지 남이 하니까, 남의 자식도 학원에 가니까, 남들이 더 좋은 차 혹은 더 좋은 집에 사니까, 생각 없이 쫓기듯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엄마 아빠,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거예요?"라고 아이들이 질문할 때 "몰라도 돼, 그냥 엄마 아빠 시키는 대로 하면 돼!"라고 말할 것인가? 솔직하고 당당한 삶에 대한 일침! 삶의 주인이 돼야 함을 강조한 대목이다.
모든 집착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부재하게 될 때 발생한다. (중략)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 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본문 중에서)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큰 깨우침을 얻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자정리'. 만난 것은 분명히 헤어지기 마련이다. 애초에 나의 것이 어디 있었으며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은 생각일 뿐 현실이 아니다. 더 이상의 집착도, 욕심도, 큰 의미가 없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2. 나와 너의 사이칸트는 혁명적이다. 칸트의 진정한 혁명성은 타인을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있는 것 아닐까? 자본주의는 돈을 목적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만드는 체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보자는 칸트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인간이 목적이 되면 돈은 수단의 지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 대목을 놓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윤리적 명령을 토대로 반자본주의적 공동체를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본문 중에서)칸트는 '자유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강신주 박사는 책을 통해 행위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인간처럼 자율적인 주체를 '목적'이라 부르고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타율적인 사물을 '수단'이라고 부른다. 즉 주인이 목적이라면 노예는 수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와 반대로 가고 있다. 돈이 목적이 되고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가라타니 고진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기 위해, 원래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모색했다. 칸트의 생각이 이상한 생각인가?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로써 목적 그 자체인가, 아니면 돈을 모으고 소비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톱니바퀴 중 하나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의 계층에 따라 존재가치가 달라지는 대상인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다.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있었던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잡혔다. 그는 1961년 12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아이히만은 상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을 변론한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無思惟)'의 책임을 부과한다. 그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강조한다. 베버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는 분업화가 전문화의 과정을 통해 구조화된 사회이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본문 중에서)이 대목을 읽지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다. 나 자신도 사유하지 않는(무사유)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사유를 하면서 살았던 게 아니라 관습에 의해, 다수결에 의해, 아무런 고민이나 사색 없이 살았던 경우가 많았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인간이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살 수 있다니….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에 대한 사유없이 명령만 따라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던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회사의 지시입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습니다" 등의 말들로 나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정당화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난 고민하며 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인 물 마냥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대로 살아왔다. 몸만 살았지 정신은 죽어 있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먹고사는 것이 너무 바쁘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우리에게 아렌트는 심장이 살아 있는지를 묻고 있다.
3.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