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과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한일 국교정상화의 막후 개입으로 뒤에 박정희로부터 일등 수교훈장을 받는다.
대한뉴스
나카소네는 아베 집안과 악연과 선연이 겹쳐 있다. 1982년 11월 부친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大郞) 외상은 나카소네와 총리직 대결에서 패배해 결국 총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59년에 나카소네 의원을 처음 입각시킨 사람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였다. 기시는 총리 시절(56~60년)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오늘의 미-일 동맹체제를 굳혔다. 기시는 동생인 사토 총리 시절에 막후에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여해 나중에 박정희로부터 일등 수교훈장을 받는다,
나카소네는 '친한파'이자 '극우파'이다. 한국인에게 '두 얼굴의 정치인'이다. 1983년에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현안이던 경협차관(40억 달러) 지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1985년 8월 15일, 총리로는 최초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해 일본 정치인들에게 참배의 물꼬를 텄다. 나카소네가 쓴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은 일본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헌법을 고치고, 교육법을 개정해 일본의 정체성을 강화하자는 일본 극우파의 염원을 담은 지침서로 통한다.
역사전쟁과 아베 인생의 전환점, 82년 '제1차 교과서 파동'돌이켜보면, 나카소네 내각이 들어선 1982년은 동북아 역사전쟁의 분기점이 된 해다. 아베 개인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아베는 외조부 기시가 권고한 세이케이(成蹊) 소학교에 입학해 중-고교와 대학까지 다녔다. 세이케이학원은 부유층 자녀나 정치가 자제가 많이 다니는 사립 명문학교이다. 아베는 1977년 세이케이대(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를 중퇴했다. 1979년 4월 일본으로 돌아와 고베제강에 입사했다.
1982년 11월 어느 날 총리직 대결에서 패한 뒤 나카소네 내각의 외무상으로 참여한 신타로가 출근하는 아들을 불렀다.
"나의 비서관이 되거라.""언제부터입니까.""내일부터다.""저에게도 회사가 있습니다.""내가 외할아버지(기시 외무상)의 비서관이 됐던 때는 하루 만에 신문사를 그만뒀다." 아베는 바로 고베제강를 퇴사하고 아버지 신타로의 비서가 된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던 아베를 정치로 끌어들인 '사건'이었다. 그때 아베의 나이 28세였다. '친한파'인 신타로는 나카소네 내각에서 4년 동안 한국과의 관계 개선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고, 그 곁에는 늘 아베가 있었다. 아베는 1991년 신타로가 병으로 죽자 36세에 '보수 왕국'인 야마구치현의 아버지 선거구를 승계한다.
1982년은 제1차 교과서 파동이 일어난 해다. 그해 6월 고교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문부성이 출판사에 부당한 왜곡(침략→進出, 3.1운동→3.1暴動)을 지시한 사실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한국과 중국은 강력히 항의했다. 일본의 진보·양심 세력도 역사 왜곡을 비판했다. 그해 8월 미야자와(宮澤) 관방장관은 "일본의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왜곡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11월에는 검정기준에 "근현대사 기술시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의견을 배려한다"는 이른바 '근린제국(近隣諸國) 조항'을 마련함으로써 1차 교과서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일본의 과거사 반성 3대 담화 |
① 미야자와 담화 : 1982년 8월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 교과서 기술 시 한국, 중국 등 이웃 국가를 배려한다는 것
② 고노 담화 : 1993년 8월 당시 고노 요헤이(河野 洋平)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소 설치 및 위안부 강제징집을 인정하고 사죄한 담화
③ 무라야마 담화 : 1995년 8월 15일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태평양전쟁 종전 50주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의 역사를 인정하고 총체적인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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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담화를 계기로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 기준은 ▲교육 내용의 가이드 라인을 설정한 '학습지도요령'과 ▲주변국 입장을 배려한다는 '근린제국 조항'의 두 가지로 정립되었다. 이 조항은 지난 30여년 동안 한-일 역사 갈등의 '안전판'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왜곡 교과서를 통해 끊임없이 '교과서 파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월 28일 문부과학성은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와 센카쿠(尖角, 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못박았다.
독도 일본 영토 명기는 사실상 '근린제국 조항'에 대한 사형선고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의 과거사 3대 담화(박스기사 참조) 가운데 가장 약한 고리인 미야자와 담화를 해체한 것이다. 아베는 이미 2기 내각 구성 전인 2012년 10월 "자민당이 집권할 경우 일본의 과거사 반성 3대 담화를 모두 수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베 역사관의 뿌리는 '새역모' 지원한 '역사교육 의원모임'아베의 그릇된 역사관의 뿌리는 '새역모'를 지원하는 의원모임이다. 그 토양은 1990년부터 시작된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함께 진행된 일본 사회의 보수화다. 1997년 2월 27일. '새역모'를 지원해온 자민당 소장파 의원 87명이 모여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歷史敎育 議聯, 역사교육 의원모임)이 결성됐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기로 1996년 검정에 합격한 중학교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의 기술이 들어가는 것에 위기감을 가진 자민당 의원들이 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