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만에 만난 동문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장 수여식 참석기

등록 2014.02.08 15:22수정 2014.02.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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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정타 할 것이다. 졸업한 지 어언 37년, 그동안 모교는 많이 발전해 있을 것이었다. 학교 재단을 우리나라 제일의 재벌 삼성이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종로구 수송동 교사(校舍)를 마감하고 강남구 일원동의 현대식 건물로 이전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100년 전통에 5만을 훌쩍 넘긴 졸업생 수가 나를 왜소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모른다. 사실 내로라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5만 졸업생 중 나는 티끌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월 6일이라고 했다. 목요일, 다른 약속이 있었음에도 어려운 서울행을 감행한 것은 무슨 이유에선가. 중동고등학교 107회 졸업식이 있는 날, 우리 개신교 130년 역사에서 보석과도 같은 존재인 산돌 손양원 목사에게 95년 만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후 따로 시간을 잡아 기념 세미나를 연다고 했다. 중동고등학교 총동창회와 중동신우회에서 그 일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가 우리 중동 동문이라니!


나는 교계의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이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주의 종이라는 관련성 외에 다른 사적인 관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많다. 주기철 목사가 그런 분이며 조만식 선생도 그런 분이고 또 손양원 목사도 그런 분 중 앞 자리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특별한 연관성을 찾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만 해도 그렇다. 그분은 사적으로의 연관성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같은 교단 목사님도 아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의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내가, 손 목사님에 대해 신문과 잡지에 몇 번 글을 쓴 적도 있는 내가 손 목사님이 중동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일었다. 그 마음을 상쇄시키고 싶은 마음의 일단이었을까. 나는 6일 아내와 함께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 행을 감행했다. 오랜만의 상경이다. 승용차로 김천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다시 1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고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 대청역에 내리니 현대식 건물 동(棟)들이 우뚝 서 있는 나의 모교 중동고등학교가 버티고 있었다.

교문에는 하늘 색 바탕에 진파랑 색깔이었을 것이다. '졸업을 축하합니다'란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사자를 상징동물로 하고 있는 중동고등학교에 파랑색은 희망의 빛깔로 자리한다. 그 바로 밑에 나란히 걸려 있는 또 다른 플래카드, '(故)손양원 목사 中東高 명예졸업장 수여' 그날 하루의 시간이 모두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면서 간단히 기도를 했다. 중동고의 발전과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는 졸업생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과 국가 발전에 동량(棟樑)들이 되게 해 주십사고….

젊음은 역시 좋다. 생동감이 있어서 좋았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해서 좋았다. 광고된 졸업식 시작 시각 15분 전인데도 강당엔 벌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좌석을 다 채우고 모자라 중간 계단에 의자를 갖다 놓았지만 그것도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부족했다. 뒤에 선 축하객들 중 단신(短身)의 사람들은 졸업식 장면을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명예졸업장 수여식을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나는 사람들을 헤집고 왼쪽 계단으로 가서 중간 앞에서 둘째 줄 학부모 석에 좌정했다. 자리 주인이 나타나면 일어설 생각을 하면서….

중동고 구영석 교무부장의 사회로 식이 시작되었다. 427명의 졸업생들에게 졸업장을 전달하고 난 뒤 손양원 목사에 대한 명예 졸업장 수여 순서가 있었다. 그는 지금 이 땅의 사람이 아니다. 6.25 동란의 희생물로 순교를 당한 목회자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하다가 한 알의 밀이 된 분이다. 그를 대신해서 따님 되는 손동희 권사가 김병민 교장 선생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손 권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아버지는 주독야경(晝讀夜耕) 고학을 하면서 중동학교를 다니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주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키는 신앙인이었다고 증언했다. 손양원 목사의 부친 손종일 장로가 경남 함안 지역 3.1운동 주모자로 걸려 일경에 의해 구속되자 손 목사도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하기 어려워 학교를 자퇴했다는 것이다. 중동학교에서 학창 생활이 1년밖에 되지 않는 이유이다. 그의 신앙이 기독교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 것은 그의 올곧은 삶의 결과라 할 것이다.

김병민 교장 선생의 졸업식사가 있었고 김득수 이사장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축사를 생략함으로 장내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어 총동문회 백강수 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는 이번에 손양원 목사가 중동고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는데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중동고 신우회와 총동문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중동고와 손 목사를 연결시키는 어려운 작업을 손수 감내해 냈다. 그가 하는 일을 보면서 역사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찾아 기록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학생 대표의 송사가 있었고 이어 졸업생 대표의 답사도 있었다. 교과 제창 때는 감회의 짜릿한 전율로 몸을 추스려야 했다. "대동이라 대한에서 서울 복판에 우뚝 솟아 눈에 띄는 우리 중동은…" 이렇게 시작하는 교가가 기억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신기했다. 중동 응원가와 함께 행사 때마다 얼마나 불러대던 노랫말인가. 특히 내가 재학 중일 때 중동 축구는 천하무적이었는데, 우승을 할 때마다 목청껏 부른 기억이 아직까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졸업식이 끝나고 김병민 교장 선생과 김득수 이사장, 백강수 동창회장 등 몇 분과 인사를 나누었다. 37년이란 세월은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을 한 분도 남아있지 않게 했다. 학교 마당엔 기념사진 찍기로 시끌벅적 했다. 백농 선생 동상 앞과 교문 근처 사자 상 앞에서 많이들 셔터를 눌러댔다. 남편의 모교를 동행한 아내는 나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37년 후배들의 틈에 끼어 사진을 찍어 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 한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후 2시, 손양원 목사 중동고 명예졸업 기념 세미나가 열리는 시각이다. 그리스도인 동문들이 얼마나 모일까 궁금했다. 준비를 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50 여 명은 올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숫자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한국 기독교 신앙의 보석 손양원 목사에 대한 세미나이기 때문이다. 또 그 분의 살아있는 따님과 한국 기독교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영등포교회 방지일 원로 목사와 균형 잡힌 사관(史觀)으로 한국사뿐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만열 교수가 강사로 초청된 세미나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의 행사는 예배로 시작한다. 안인섭 총신대 교수의 사회로 예배를 드렸다. 광성교회 이근호 목사의 기도에 이어 테너 강영린 선생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특송, 광교산울교회 이문식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이 목사는 히브리서 12장 24절을 본문으로 '더 나은 피'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아벨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화해의 피인데, 손양원 목사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며 오늘날 손양원 목사의 원수까지 사랑한 그 화해의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2부 강연 및 토론의 시간이 이어졌다. 손양원 목사의 따님 손동희 권사가 30여 분에 걸쳐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삶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고, 금년 104세 되시는 방지일 목사가 손양원 목사의 평양신학교 학창 생활을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고 지금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손양원 목사의 한국사적 의미'를 발표하고 잠깐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만열 교수는 손양원 목사에 대해 냉철하게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한 인물에 대해 영웅주의적 포장을 즐겨하는 사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절한 것을 기독교의 우상숭배 관점에서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마뜩찮게 여겼다. 또 오늘날 정권과 조금만 다른 소리를 내도 종북으로 매도하는 것을 비판했다. 종북 프레임이 나라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남과 북 양쪽 모두 이런 일방적 여론몰이로 이득을 보는 층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국가의 장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도 오늘날 갈기갈기 찢겨져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이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화해 정신이라고 결론 맺었다.

질문 시간에 나는 두 가지를 물었다. 첫째, 손양원 목사가 틀에 갇힌 고정된 목회를 거부하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목회를 했다면 그를 오늘날 소위 이야기하는 진보적 목회자로 볼 수 있는가? 둘째, 이 교수께서 일제의 신사 참배 거부를 기독교의 십계명 중 제1과 제2, 즉 나 이외의 신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것을 들이밀며 신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늘 날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참배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손 목사님을 진보적 목회자로 보기보다는 고정된 틀에 갇혀 목회를 하지 않고 세계 신학 조류를 다 파악한 다음 그 선상에서 열린 목회를 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며, 일본의 신사 참배를 국민의 풍습으로 하는 것과 국가 지도자들이 전범들의 위패(位牌)을 안치해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답변했다.

우리는 세미나를 마치고 단체 사진을 찍은 뒤 로비에서 간단한 다과를 들며 담소를 나누었다. 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대학원까지 긴 기간 많은 과정들을 공부해 왔지만 고등학교 동문처럼 친근하고 편안한 대상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각자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 먼저 기수로 따져 사람을 구획하는 것부터 그렇다. 어떤 동문회는 가진 자들이 판을 쳐 동문회 질서를 흐려놓는다고 하지만 우리 중동고 동문회는 그렇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만약 그런 분위기였다면 아무리 좋은 명분을 걸고 나를 오라고 했더라도 쉽게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37년 만에 처음 모교 졸업식을 참석하고 세미나에 함께 한 것은 손양원 목사님이 동문으로 소속되는 엄숙한 의식에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석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양원 목사님은 나의 굳은 마음을 사랑으로 풀어준 장본인이 되는 셈이다. 
#손양원 목사 #중동고등학교 #명예졸업장 #기념 세미나 #중동고 신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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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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