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 출연진(이충주, 지혜근, 강은애, 김태한, 조정환, 구원영_왼쪽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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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팩션'의 시대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장르를 일컫는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등은 팩션의 옷을 입고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대표작이다.
허구가 사실을 인용해 객관화를 꾀하는 방법은 수용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하지만 최근 1~2년을 돌아보면 '팩트'와 '픽션' 중 어느 것도 건지지 못하는 장르물만 양산되고 있다. 어설픈 팩션물은 진지해야만 한다는 함정에 빠져 의미 없는 모호함을 무기 삼아 논란을 일으킬 뿐이다. 이 가운데 팩션의 나태함을 대차게 벗어던진 정통 픽션물이 나타났다. 바로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다.
믿거나 말거나, 상상의 자유는 그대에게구한말, 조선의 마지막 왕세자 순종(이척)은 화려한 궁궐이 답답하기만 하다. 어머니 명성황후는 그를 굳건한 왕재(王才)로 키우고자 스파르타 교육을 강행하고, 아버지 고종은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측은한 눈길로 이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순종은 유일한 친구 폴 내관이 조선을 떠나려고 하자 그와 함께 몰래 궁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일이 꼬여 저잣거리의 남사당패 무리에 섞이고, 호기심과 끼를 겸비한 순종은 그들과 함께 조선 최고의 예인(藝人) 경합에 참가하게 된다.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옷만 사극으로 갈아입은 현대극에 가깝다. 인물들은 지금 시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과잉된 교육열, 세대 간의 갈등, 때때로 빚어지는 가족 구성원의 일탈 등은 이제 뉴스 헤드라인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시시한 이슈가 돼 버렸다. 그럼에도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가 아주 잘 빠진 창작극인 이유는 작품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픽션이라는 장치 덕분이다.
이야기는 조선의 마지막 내시인 폴 내관의 뒤죽박죽 일기장에서 시작된다. 폴 내관은 전설적 그룹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그가 치매에 걸려 아무렇게나 써 제낀 비망록에는 '순종이 가출했다'는 단 한 줄만 쓰여 있다. 모든 이야기는 이 한 줄을 바탕으로 재구성된다. 재연이 아니다. 무대 위 해설자의 마지막 말마따나, '믿거나 말거나'다.
이러한 설정은 극작·연출가, 배우 등을 비롯한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불필요한 힘을 들이지 않고도 모든 틀을 변형하거나 해체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장치다. 종종 연출가들이 배우에게 '무대에서 놀아 봐라'는 주문을 할 때가 있는데,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에서 이 말은 흡사 관객에게 '네 머릿속에서 놀아 봐라'는 당돌한 허용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발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