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모리 대학 도서관장과의 기념 촬영
안민석
윤치호의 애국가 친필본은 에모리 대학 도서관 10층에 보관돼 있었다. 애국가 친필본뿐만 아니라 윤치호가 평생 썼다는 일기장까지 열람이 허용되었다. 일기장은 1943년 11월까지 작성되었는데 영어로 쓴 일기장을 꼼꼼히 뒤지는 동안 윤치호의 한글 친필을 찾아내는 행운을 얻었다. 애국가 친필본 위조설을 규명하려면 윤치호의 한글 친필이 있어야 필적 감정이 가능한데 이번 방문을 통해 일기장에서 한글 친필을 촬영한 것은 의미있는 수확이었다.
두 시간에 걸친 열람을 마치면서 나는 윤치호 작사설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작사 시기에 대한 의문이다.
지금까지 윤치호 애국가 친필은 1945년 10월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확인한 바로는 10월이 아니라 9월임이 밝혀졌다. 또 윤치호의 사위가 직접 기록한 윤치호의 사망 시점과 사인(死因)이 '1945년 11월 치과 치료를 받고 집으로 가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2월에 사망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80세였던 윤치호가 치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것은 건강했음을 반증한다. 죽음을 앞둔 처지도 아니었던 1945년 9월에 애국가 친필본을 작성한 배경은 해방 정국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친일가족이 처한 위기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즉, 해방 정국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심판과 처단이 팽배하자 위기감을 느낀 윤치호 가족들이 애국가 작사로 면죄부를 받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독 작사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이것이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의 핵심 증거로 활용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둘째, '역술'(譯述)이 '작'(作)으로 바뀐 점에 대한 의문이다.
현재의 애국가는 1908년에 윤치호가 역술(譯述)했다는 '찬미가'라는 미국 성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역술'은 창작이 아니라 '번역해서 썼다'는 말이다. 즉, 창작품이 아니라 번역 소개했다는 얘기다. '역술(譯述)'과 '작(作)'은 엄연히 다르다. 세월이 흘렀다고 '역술'이 '작'이 될 수는 없으므로 1908년에 '역술'이었던 것이 1945년에 '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윤치호가 친필본에서 '작(作)이라는 표현을 쓴 것 또한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한글 간소화 운동을 주도하는 등 누구보다 우리말 어법과 어의(語義)에 해박했을 윤치호가 '역술'과 '작'의 차이조차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셋째, 애틀랜타 이민자들의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이번 방미에서는 애틀랜타 한인회가 발간한 이민사 관련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인회의 이민사 관련 기록에 의하면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애틀랜타 에모리 대학을 다닌 윤치호란 인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윤치호에 대해 많은 관심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애틀랜타 이민사 기록에서 윤치호를 단독 작사자로 단정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애국가는 공동 창작물이라는 중앙대 노동은 교수의 주장에 무게를 더해 주는 기록이다.
넷째, 윤치호의 일기장에 애국가와 관련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윤치호는 평생 일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마침 이번 에모리 대학 방문에서 일기장 원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치호 연구자들에 의하면 윤치호의 일기장에는 애국가 관련 언급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한다. 일기는 마음의 거울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경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윤치호도 국왕(國王)에 대한 비난이나, 자신의 금전기록까지 꼼꼼하게 일기에 적었을 정도로 세세하게 일기를 썼다.
그런 그가 만약 애국가를 작사하였다면 일기장에 애국가를 지은 경위를 포함해 소회 등을 남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윤치호 애국가 작사자를 주장하는 분들은 윤치호 일기장의 미스터리에 대한 답을 국민들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윤치호 애국가 친필본, '광복직후' 작성 확인 |
(애틀랜타=연합뉴스) 김재현 특파원 = 친일파 지식인 윤치호(1865~1945)가 자필로 애국가 가사를 적은 문서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문서가 1945년 8월 광복 직후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지난 1월 31일(현지시간) 문화재 환수 추진 단체인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혜문 스님과 함께 미국 에모리대 도서관을 방문, 윤치호의 애국가 가사 친필본의 존재를 확인했다.
윤치호가 애국가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에모리대에 보관된 친필본을 윤치호가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증거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에모리대가 이날 안 의원과 혜문 스님에게 공개한 친필본의 앞면에는 애국가 가사와 '1907년 윤치호 작사'라는 서명이,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윤치호)께 친히 써주신 것. (딸) 문희'라는 글이 각각 적혀 있었다.
에모리대는 1997년 윤치호의 후손으로부터 친필본을 기증받고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 보관해왔다.
그러나 안 의원 등은 친필본이 광복 한 달 뒤에 작성됐다는 점에서 이 문서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긴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안 의원은 "윤치호가 친필본을 쓴 시기가 애초 알려진 1945년 10월이 아닌 9월이란 사실에 주목한다"며 "보름 정도 해방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친일이 아니라 애국가를 작사해 항일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바뀐 세상에서 부랴부랴 애국가 작사를 남긴 것으로 짐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방 정국의 한 달 차이는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친일했던 윤치호 측에서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친필본을 함께 열람한 김준혁 경희대 교수는 "윤치호의 친필본이라는 것이 왜 써졌느냐는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1945년 9월에 남긴 것이 친일의 흔적을 없애려는 의도라면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이와 함께 "친필본이 본래 윤치호의 필적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두 필체가 같다고 확인된 적이 없다'는 대학 관계자의 진술이 있다"며 "앞으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진저 스미스 도서관 대외협력국장은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 "1945년도 친필본이 윤치호가 쓴 것인지는 복수의 검증(double check)을 거쳐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스미스 국장은 휴가를 이유로 열람 자리에 불참했다.
혜문 스님은 안 의원과 김 교수와 달리 친필본이 애국가 원작자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친필 원본의 서지(書誌)를 확인한 것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이제는 여러 경로를 거쳐 과연 이것이 윤치호가 썼는지를 검증하고 애국가 작사가를 확정하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혜문 스님이 이끄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는 에모리대 친필본을 근거로 윤치호가 원작자라는 데 무게를 두고 최근 '친필본 환수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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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안민석입니다. 제 꿈은 국민에게는 즐거움이 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삶의 모델이 되는 정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마이에 글쓰기도 정치를 개혁하고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 중에 하나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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